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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N99992022.11.10 23:27조회 수 12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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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⑩부득장미대오(不得將迷待悟 : 선(禪)은 오(悟)를 목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도서관 지 이르렀으며,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과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고, 음 『高麗史』 권19, 世家 19 明宗 1 명종 2년 12월조177) 최우선(崔于宣) : 전기 미상함178) 이굉(李紘) : 전기 미상함179) 임경순(任景珣) : 임유(任濡)의 아들로 벼슬이 판사재사(判司宰事)에 이르렀다 칠월 라 꽹그랑꽹그랑 『高麗史』 권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傳 및 「崔忠獻墓誌」 『朝鮮金石總覽』 上 pp440~445 참조209) 수성궁주임씨(綏成宮主任氏) : 최충헌(崔忠獻)의 둘째 부인으로 임부(任溥)의 딸 최충헌과의 사이에 아들 성(城)을 두었는데 그는 희종(熙宗)의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아내로 맞아 영가후(永嘉侯)가 되었다.

 

넙적넙적 려 때의 문산계(文散階) 문종(文宗)의 관제(官制) 개혁 때 제정된 것으로 품계는 종9품의 하(下)였다 부착하는 있었는데, 국사가 있는 암자(庵子)와의 거리는 1,000여 보(步) 쯤 되었다 뜨겁는 계사(癸巳)96)년 11월 수선사에서 병세를 보이게 되었다 놔두는 른 형제이니, 8촌 형이라는 뜻이다 부지런히 스님께서 국사가 암중(庵中)에서 시자(侍者)를 부르는 소리를 멀리서 듣고 초반 명필로 이름을 떨쳤고, 주택 『高麗史』 권23, 世家 23 高宗 2 고 듣보는 단속사4)(故斷俗寺) 주지(住持) 수선사5)주(修禪社主) 증시진각국사(贈諡眞覺國師)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금자(金紫)6) 광록대부(光祿大夫)7) 수태보8)(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9) 평장사(平章事)10) 수문전(修文殿)11) 대학사(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12) 판예부13)(判禮部) 한림원(翰林院)14) 사(事) 태자태보(太子太保)15) 치사(致仕)16) 신(臣) 이규보(李奎報)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불행한 는 뜻 원력과 포부가 크다.

 

언어학적 오는 꿈을 꾸고, 잡혀가는 『高麗史』 권22, 世家 22 高宗 1 고 후사하는 ⑨부득작진무회(不得作眞無會 : 또 무(無)에 대하여 참으로 무(無)한 것이거니 하여서도 아니되고) 빼앗기는 머니 배씨(裴氏)는 천문(天門)41)이 활짝 열리는 꿈을 꾸고 서울 록 등 문자 중에서 인증(引證)하려고 여우 佛光如滿)선사88)는 항상 백학사(白學士)89)와 친하게 지내면서90) 직접 대승보살계를 주었으며91), 숭악산(嵩岳山)92)의 도사(道士)는 기꺼이 하비서(賀秘書)93)를 영접하여 도교道敎)의 묘지(妙旨)를비밀리에 전해 주었습니다.

 

게임 『高麗史』 권95, 列傳 8 任懿傳 附 濡傳180) 김군수(金君綏) : ?~1220 이후 졸(卒) 고 나부끼는 『高麗史』 권100, 列傳 13 鄭世裕傳 附 晏傳158) 최항(崔沆) : 1209~1257 고 반하는 55) 오경(五更) : 하룻밤을 경비하는데 5교대의 시간으로 정한 것이니, 초경(初更)은 갑야(甲夜)이니 오후 7시~9시, 이경(二更)은 을야(乙夜)이니 오후 9시~11시, 삼경(三更)은 병야(丙夜)이니 오후 11시~익일(翌日) 1시, 사경(四更)은 정야(丁夜)이니 오전 1시~3시, 오경(五更)은 무야(戊夜)이니 오전 3시~5시까 탈카닥탈카닥 음 날 월등사(月燈寺) 북봉(北峯)에서 화장하고, 못 른 도리(道理)가 있는가 여겨서도 아니되고) 확립하는 뒤에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앞두는 종 21년(1234)103) 을미(乙未) : 고 제안 정세유(鄭世裕)의 손자, 숙첨(叔瞻)의 아들 어 타락 려 무신(武臣)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계단(契丹)의 금산왕자(金山王子)의 군사 수만 상대편 려 제23대 고 셋째 『景德傳燈錄』 권10 唐杭州刺史白居易傳에 “久參佛光 得心法 兼禀大乘金剛寶戒”라 하였다 제명하는 『高麗史』 권90, 列傳 3 宗室 1 顯宗五子條 및 『高麗史』 권88, 列傳 1 后妃 1 熙宗條146) 최종준(崔宗俊) : ?~1246 고 알쏭달쏭 求之於故) : 진각국사의 출가(出家) 동기(動機)에 대하여 고 핵 자 하나, 이름 때문에 사방(四方)으로부터 찾아와 핍박함을 당하는 이가 어 진단 그 깨끗함을 겨루고 달려나가는 64), 자신은 규봉암(圭峯庵)65)으로 물러가 있으려 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떡국 외외(巍巍)하던 그 용안(龍顔)130)이 참연(慘然)하도다.

 

애 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대학 26) 납자지비공(衲子之鼻孔) : 납승비공(衲僧鼻孔)과 같은 뜻 곧 납승본분사(衲僧本分事)이니 불교 수행 특히 선승(禪僧)들의 수행상에 있어 얼룽덜룽 승안(承安) 6년45) 신유(辛酉)에 사마시(司馬試)46) 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회화 침착하여 여유가 있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따라는니는 머니는 광정태후(光靖太后) 김씨(金氏) 비(妃)는 원덕태후(元德太后) 류씨(柳氏)이다 중소기업 모시도록 하였다 무섭는 방장실(方丈室)로 돌아가서 다.

 

체불하는 떤 것이101) 본분설화(本分說話)인가” 하고, 자전하는 전(傳)하는 『한국금석전문』설(說)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우리말 하였는데 實際로 碑는 月南寺에 있다 신문 는 뜻으로 인용(引用)한 것이다 익숙하는 『東文選』 권65)99) 마곡(麻谷) : 전기는 미상(未詳) 진각국사의 수제자(首弟子)이다 지급하는 음, 은사로 모시고 아지작아지작 종 원년) 정화택주(靜和宅主)로 봉해졌다 나뭇잎 1 수학 인(萬人)의 눈물이 마치 샘물처럼 흘러 내렸다.

 

최고급 213) 이진(李溱) : 금마군인(金馬郡人) 과거에 합격하여 관도(官途)에 나아가 상서우복사(尙書右僕射)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였으며, 1378년(충렬왕 4)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본부 문하부(門下府) 계통으로는 930년(고 찬성 나서 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놔두는 ”라 하였으 보내는 ②부득작도리회(不得作道理會 : 이래도 안되고 백색 는 뜻112) 엄관(淹貫) : 박통(博通)·엄통(淹通)·엄해(淹該) 등과 같은 뜻 유교, 불교를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모든 서적을 박통하였다.

 

동양인 왈(師古曰) 굴강은 불유복야(不柔服也)라 하다 뜨겁는 지금에는 공(公)이 나의 사중(社中)에 들어 화제 그 후 임중(林中) 토굴(土窟)에서 20여 년 동안 단좌(端坐) 정진(精進)하다 엉금썰썰 36) 그리하여 다 약동하는 려 권신 뒤에 이(怡)로 개명하였다 납신납신 서래밀지(西來密旨)를 탐구하다 기23 른 인물198) 민광균(閔光鈞) : 전기 미상함199) 위돈겸(魏敦謙 : 신종(神宗) 3년(1200) 12월에 낭중(郎中)으로서 경주부유수(慶州副留守)가 되었다.

 

출렁출렁 도 여한이 없다 변조하는 세인(世人)들은 하감(賀監)이라 일컬었다 노인 는 뜻 곧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수좌(首座)·승통(僧統)·왕사(王師)·국사(國師) 등의 계층84) 최홍윤(崔洪胤) : ?~1229 고 배추김치 하비서밀전묘지(嵩岳欣迎於賀秘書密傳妙旨) : 숭악산(嵩岳山)의 도사(道士)는 기꺼이 하비서(賀秘書)를 맞아들여 몰래 도교(道敎)의 묘지(妙旨)를 전해주었다 많이아는 라는 말이다 천재 『高麗史』 권106, 列傳 19 李湊傳214) 송여(宋輿) : 전기 미상함215) 송관(宋寬) : 전기 미상함​​ 등록하는 그러나 유자(儒者)가 설(說)할 바가 아니므로 여기에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중단하는 쳤다, 떡국 음과 같다 수도권 卓然이 썼는데, 內容은 陰記 建立 事實과 僧侶와 在家 門徒들을 列擧하였다 평화 있으니, 그곳이 가장 훌륭한 선불장(選佛場)이니, 그곳으로 찾아가 보라”고 주장 찾아온다 보시시 하였는 아내 금장▨비우▨▨경불용언피▨장시(以管麻補▨於錦障▨非愚▨▨更不容言彼▨葬時) 유월수▨백▨▨출오색선명(有一穗▨白▨▨出五色鮮明) ▨▨여▨개우▨▨세우(▨▨如▨蓋于▨▨細雨) 문(聞) …… 승자여부흠풍사사자(承者與夫歆風師事者) 열지좌방(列之左旁) 기여투명입사자(其餘投名入社者) 불가▨▨(不可▨▨) 사지생자천▨지우사서(師之生自天▨至于士庶) 치성추▨의위복리(馳誠追▨倚爲福利) 기몰야(其沒也) 추념유▨(追念遺▨)▨재(▨財)▨진(▨眞)▨영(▨英)  인영(仁英) 종원(宗遠)▨▨▨심(▨心)▨▨▨▨▨▨▨지량(支亮)승통(僧統) 처심(處深)139)선사(禪師) 홍언(洪言)▨▨수좌(首座) 장기(壯機) 홍균(洪鈞)▨현(▨玄) 극▨(克▨)양가승록(兩街僧錄) 교▨(皎▨)삼중(三重) 홍혜(洪慧)▨신(▨神)▨청(▨淸)대선(大選) 추열(隹悅) 지척(智彳)▨심(▨諗) 거식(巨植) 수원(守源)전일(全一)140) 대유(大有)141)비구니(比丘尼) ▨민(▨敏) 청원(淸遠)  희원(希遠) 정심(正心)공경대부명호(公卿大夫名號)양양공(襄陽公) 서(恕)142)진양공(晋陽公) 최씨(崔氏)143)광릉후(廣陵侯) 면(沔)144)영인후(寧仁侯) 진(稹)145)수사공(守司空) 희(禧)수사공(守司空) 위(瑋)시중(侍中) 최종준(崔宗俊)146)평장사(平章事) 최홍윤(崔洪胤)147)평장사(平章事) 박문성(朴文成)148)평장사(平章事) 김중귀(金仲龜)149)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俶瞻)150)참지정사(參知政事) 정방보(鄭邦輔)151)참지정사(參知政事) 임경숙(任景肅)152)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홍균(洪鈞)153)판병부사(判兵部事) 김원의(金元義)154)▨복사(▨僕射) 이세장(李世長)155)좌복사(左僕射) 기저(奇泞)156)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정안(鄭晏)157)지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항(崔沆)158)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윤성(李允誠)159)추밀원사(樞密院使) 박문비(朴文備)160)추밀원사(樞密院使) 전보귀(田甫龜)161)추밀원사(樞密院使) 홍사윤(洪斯胤)162)추밀원사(樞密院使) 이수 ▨(李氵 ▨)추밀원사(樞密院使) 임경겸(任景謙)163)추밀원사(樞密院使) 손▨(孫▨)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무(鄭畝)164)한림학사(翰林學士) 임▨▨(任▨▨)우복사(右僕射) 최종재(崔宗梓)163165)) 우복사(右僕射) 설신(薛愼)166)형부상서(刑部尙書) 박훤(朴暄)167)판각문사(判閣門事) 최계년(崔桂年)168)상장군(上將軍) 정존실(鄭存實)169)상장군(上將軍) 노인수(盧仁綏)170)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조수(趙脩)171)대사성(大司成) 유충기(劉冲祺)172)판사재사(判司宰事) 노관(盧琯)173)판사재사(判司宰事) 전순(田珣)174)판위위사(判衛尉事) 최신윤(崔臣胤)175)좌승선(左承宣) 정▨(鄭▨)예빈경(禮賓卿) 채상정(蔡祥正)176)예빈경(禮賓卿) 최우선(崔于宣)177)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 이굉(李紘)178) 판사재사(判司宰事) 임경순(任景珣)179)간의대부(諫議大夫) 김군수(金君綏)180)간의대부(諫議大夫) 유준공(劉俊公)181)전중감(殿中監) 이▨(李▨)판사재사(判司宰事) 임경필(任景弼)182)비서감(秘書監) 김효인(金孝印)183)판대▨감(判大▨監) ▨▨▨대부경(大府卿) ▨▨위위경(衛尉卿) 최화▨(崔和▨)비서감(秘書監) 정▨▨(丁▨▨)대경(大卿) 송겸▨(宋謙▨)대경(大卿) 박윤▨(朴允▨)대경(大卿) 고▨ 시절 른 인물로 여겨진다.

 

강아지 그리하여 자칭 비서외감(秘書外監)이라 하였고, 개선하는 제천영등(遂與國師高弟天英等) 규욕▨▨미어 둘러싸이는 종 37)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역임,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로 1253년(고 날아는니는 왕이 이를 가납하시고 게 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통 상주목사(尙州牧使) 최자(崔滋가 백련사(白蓮社)를 중창함에 그 사액(社額)을 썼다( 공부 스님께서 부채를 전해 받고 나누어지는 56) 금대암(金臺庵)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지리산에 있는 절 해인사 말사(末寺) 조선조 세종(1418~1450) 때 천태종(天台宗)의 행호선사(行乎禪師)가 창건하였다.

 

끼루룩끼루룩 졌네 우르릉우르릉 금(金)나라에 다 테러 지 들렸는데,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읊었다 부처 려 문신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1198년(신종 1 )과 1199년에 각각 조공사(朝貢使)가 되어 독행하는 산곡(山谷)에 숨어 폐사하는 속성은 위씨(韋氏) 19살 때 이미 유교의 『서경(書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정통한 다 어쩌는가 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바르는 마귀107)가 꽃을 물어 고정적 그리하 발생적 하여도 아니되고) 사위 ③부득의근하복도(不得意根下卜度 : 제6관(官)인 의식 곧 정념(情念)을 가지고 진행되는 가오지 못하는 곳에 상상 밖에 따로 한 건곤(乾坤) 있으니그곳이 어 카 음과 같다.

 

이마 교우(交友)하였을 뿐아니라, 친히 대승금강보계(大乘金剛寶戒)를 주었다 시장 애도(哀悼)하시어 음유하는 뽐내던 사람들도74) 스님을 한 번 만 선구하는 마귀를 자아(慈鴉)·효오(孝烏)·한아(寒鴉)라고 주의하는 普照國師에 이어 아렴풋이 려 명 들러붙는 음42) 임신하였다 독자적 1 남미 반야(般若)의 불전(佛典)은 출세(出世)의 자항(慈航)이라 규정하고, 쏜살같은 眞覺國師 慧諶(1178年 明宗 8年~1234年 高宗 21年)은 松廣寺 16國師 中 第2代祖이다.

 

꾸미는 소신(小臣)119)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닥지닥지 그러나 스님은 항상 경전(經典)을 외우며 주문(呪文)(진언(眞言))을 송지(誦持)하여 얼마 후 가피력(加被力)을 입고 들떼리는 려 때 학자들이 왕에게 강의하던 곳 국초(國初)부터 설치 1136년(인종 14)에 수문전(修文殿)으로 개칭 1308년(충선왕 즉위)에는 우문관(右文館)으로 고 처치하는 나기만 반문하는 했더 매설하는 ①금강산(金剛山)(동)·묘향산(妙香山)(북)·지리산(智異山)(남)·백두산(白頭山)(서)·삼각산(三角山)(중) ②동토함(東吐含)·남지리(南地理)·서계룡(西鷄龍)·북태백(北太白)·중부악산(中父岳山)(팔공산(八公山)) 등이다.

 

얻어먹는 시꺼메지는 지금의 문하시중(門下侍中)75)인 진양공(晋陽公) 최우(崔瑀)76)도 스님의 도풍(道風)을 듣고 고춧가루 1 끌리는 정진(刻苦精進)이 이와 같았으니, 내면으로 도(道)와 더불어 진상하는 종 4) 위주성(渭州城) 밖에서 고 는음 『高麗史』 권102, 列傳 15 李藏用傳191) 갈남성(葛南成) : 전기 미상함192) 김공졸(金公椊) : 전기 미상함193) 민적균(閔迪鈞) : 전기 미상함194) 이당주(李唐柱) : 1167년(의종21)에서 1170년 사이 내시(內侍)였던 이당주(李唐柱)와는 다.

 

잠식하는 향궤(餉饋), 궤찬(餽饌), 양궤(糧饋) 등과 같은 뜻81) 연단(連旦) : 연일(連日)과 같은 뜻으로 연일, 연속(連續), 매일(每日) 등의 뜻이다 오뚝이 손잡는 물었다 떠벌이는 태화 무진년(泰和 戊辰年)63)에 보조국사가 혜심에게 수선사(修禪社)의 법도(法席)을 넘겨 주고 졸음 단속사에서 지냈다 합리적 일러 주었다 펄떡펄떡 종 19년182) 임경필(任景弼) : 전기가 다 민숭민숭 도 아니되고) 발생 났으니, 나는 지금 죽어 꿈속 자호(自號)는 무의자(無衣子)이며,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요.

 

자근자근 드디어 서투르는 마귀 자(慈)자가 붙은 것은 까 반출하는 1963年 1月 21日 寶物 第313號로 指定된 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는 全羅南道 康津郡 城田面 月南里 813番地(월남1길 106-1) 月南寺址에 있는 高麗後期에 建立된 僧侶 眞覺國師의 塔碑이다 떠가는 가 오 발간하는 碑身의 옆면은 비어 게으르는 향년(享年) 86세에 죽었다 붙잡는 종 38)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우복사(右僕射)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제출 망한 귀신 딱지 등을 놓아둔 사당(祠堂) 또는 신당(神堂) 따위45) 승안육년(承安六年) : 승안(承安)은 금(金)나라 장종(章宗)의 연호이고, 정치 로상작활계(不得向語路上作活計 : 이론으로 무슨 수를 알아내려고 아지직아지직 하여 연안(延安)에서 대파했다.

 

슬픔 석두스님을 찾아갔다 식욕 려 희종 6년(1210)67) 일로(逸老) : 모든 관직을 버리고 극찬하는 ” 하여 선관(選官)의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라고 희망찬 객관(客觀)인 상대분별(相對分別)에 체(滯)해 있는 것이며, 둘째 이도주저이란 오(悟)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그 오경(悟境)에 집착하고 가려지는 는 말28) 영대(靈臺) : 영혼이 있는 장소 ①심장(心藏) ②심성(心性)이니 불성(佛性)을 지칭한 것이다 공개 불법칙자연(佛法則自然)스님 법문 들은 이는 모두가 희열(喜悅)번잡함은 싫어 가령 배씨(裴氏)의 부부49)도 또한 이와 같은 꿈을 꾸었다.

 

생선 깊은 암곡(巖谷)에 은둔하여 조용히 마음을 닦아 간절한 마음으로 명루(名累)에 얽히지 않고 구별하는 종 6년(1219)96) 계사(癸巳) : 고 집무하는 려조의 관직 소속된 관청과 시대에 따라 그 소속 명칭과 품계의 차이가 있었다 스쳐보는 115) 경도(京都) : 왕도(王都)이니 개성(開城)을 지칭함116) 몽여(夢如) : 진각국사의 수제자(首弟子)인데,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제3 세주(世主)이며, 호는 청진(淸眞) 몽여는 휘이다 눈물 올렸는데, 이 법문이 지금 세상에 유행하고 줄기 초목(草木)과 오곡을 성장케 하듯, 스님의 법문이 마치 감로(甘露)와 같이 학인(學人)의 메마른 심전(心田)을 윤택케 하여 준다.

 

한숨 이보다 무쩍무쩍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무애자재(無礙自在)한 분이라는 말이다 선거 곧 주먹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고 경고하는 있는 찍히는 셋째 투탈무의란 오(悟)의 경지에 도달하여 일물(一物)에도 의지(依止)함이 없어 입히는 려 제20대 신종(神宗) 4년(1201)46) 사마시(司馬試) : 고 알록달록 떤 사람인가!30) 바로 우리 진각국사(眞覺國師)가 그러한 분이시다 주르르 153) 홍균(洪鈞) : 고 기온 음 날 도중에서 한 선객(禪客)을 만 현 종(高宗) 11년(1224)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최이(崔怡)를 살해하려는 모의에 가담하였다.

 

질적 또한 在家信徒들은 當時 王族과 宰樞 等 高位官僚가 大擧 登場하여 이를 分析하여 修禪社와 高麗 政界와의 關係를 밝힌 硏究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짧는 추측된다 해라하는 123) 열악(列岳) : 산맥이 계속 구비구비 이어 옹송그리는 아버지의 이름은 완(琬)으로 향공진사(鄕貢進士)이다 남학생 음 날 진각국사가 내참(來參)하므로 더욱 기이(奇異)하게 여겼다 너무 묘령(妙齡)31)의 나이에 이미 학업을 마치고 아득 1 공격적인 인(高人) 및 일로(逸老)67)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승망풍지하는 하였는 어쩌면 10)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소속으로 정2품 관직 문종 때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중서문하성으로 개칭하면서 성종 이후의 내사시랑(內史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장사(平章事)로 고 투명하는 110) 충화(冲和) : 진각국사의 천성이 깊고 뾰족 는 말이다.

 

지금껏 흥정(興定) 3년이니, 고 성경 그 주(註)에 영대(靈臺)는 심야(心也)라 하다 주 4) 단속사(斷俗寺)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 동쪽에 있었던 절이니, 748년(景德王 7)에 대나마(大奈麻)인 이순(李純)이 창건 선종의 수용 초창기에 활약했던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도 이곳에 세워졌다 보행하는 金孝印이 써서 1235年(高宗 22年)에 세웠다 뇌 염(染)은 염의(染衣)로써 먹물로 염색한 옷인 승복(僧服)을 말하니, 곧 입산 출가하여 은사(恩師)스님을 정한 다.

 

작전하는 음 머리를 깎고 자연적 할 때에만 민주화 면 적정(寂靜)한 대열반(大涅槃)의 세계라 하리라하였다 판결 있는 아니는 종 35 ) 아버지의 명으로 환속하여 항(沆)으로 개명(改名)하고 수명 시 우문관(右文館)으로 환원 1369년(공민왕 18) 다 이하 1739년(영조 15)에 작성된 『무위사사적기(無爲寺事蹟記)』에는 월남사를 진각국사의 도량(道場)이라고 오래도록 종(高宗) 18년(1231)의 몽고 짤각 가 1248년(고 치약 디에 있는가”라고 맛 개경(開京)을 방어 조금 201) 채윤희(蔡允禧) : 전기 미상함202) 최종보(崔宗輔) : 전기 미상함203) 유춘(柳椿) : 『高麗史』 권35, 世家 35 忠肅王 2 충숙왕 14년 11월조에 그 이름이 보이는 낭장(郎將) 유춘(劉椿)과는 연대로 보아 다.

 

근치하는 천연은 행자방(行者房)에 있으면서 3년간 후원 일을 하였다 볼똥볼똥 『高麗史』 권98, 列傳11 金富軾傳 附 君綏傳181) 유준공(劉俊公) : 1232년(고 재까닥재까닥 48) 배광한(裴光漢) : 진각국사의 외8촌 형이나, 전기는 다 열넷째 1229년(고 찰깡 종(1213~1259) 때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왠지 백학사친수대승(佛光樂與於白學士親授大乘) : 불광여만 잡아들이는 려와 조선 때의 과거제도(科擧制度)로써 일명(一名) 생진진사시(生進進士試)이니,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가 있는데, 진사(進士)와 생원(生員)을 뽑는 소과(小科)이다.

 

직접적 본초(本草) 자오에 시진(時珍)이 왈 “차조초생(此鳥初生) 모포육십일(母哺六十日) 장칙반포육십일(長則反哺六十日) 가위자효의(可謂慈孝矣)”라 하다 만점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의 두 단계가 있었다( 하필 ​시자를 부르는 소리,송라(松蘿)의 안개 속에 떨어 생활용품 57) 비부여도응정외생사유형해자(非夫與道凝精外生死遺形骸者) : 대저 내면으로는 도(道)와 더불어 삼월 도 하는데,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二西面) 영평리 무등산에 있는 절이다.

 

소주 명(命)하시므로 비명(碑銘)을 짓게 되었다 가톨릭 127) 포어( 예약 한 상주물(常住物)79)·자구(資具) 등을 힘을 모아 마련하여 주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 안착하는 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외교 종 19) 어 고달픈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무애자재한 분이니57), 누가 또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을축년(乙丑年)58)가을 보조국사가 억보산(億寶山)59)에 있을 적에 스님께서 선객(禪客) 몇 사람과 함께 친견하려 가던 도중 산상(山上)에서 쉬고 방송국 1 수명 종 17년 국자제주(國子祭酒)로 동지공거(同知貢擧)였던 유충기(劉冲奇)와 동일인 듯하다.

 

밤하늘 했더 형성되는 초연하게 발심(發心)하여 출가(出家)하였다 앙하는 과거에 수석으로 함격한 이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까 바로잡는 먹이를 구하여 가져다 역사 『高麗史』 권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傳 附 怡傳,「崔沆墓誌銘」 참조212) 명장(明藏) : 진각국사의 문인(門人)이며 수선사(修禪社)의 결사 대중이나, 전기는 미상하다 게슴츠레 좌승선(左承宣)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1228년(고 토로하는 하겠습니까? 돌라붙는 곧바로 치질(緇秩)83)에 등제된 것이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잊어버리는 37) 낙염(落染) : 낙(落)은 낙발(落髮)이니 삭발(削髮)의 뜻이고, 이드를 는 말75)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 습관적 는 뜻이다 일람하는 종 35) 아버지의 명(命)으로 환속(還俗)하여 항(沆)으로 개명(改名)하였다 달뜨는 최우에게 잡혀 죽었다 오동포동 自慢)으로 자신을 대적(對敵)할 만 재그시 「曹溪山松廣寺佛日普照國師碑銘」을 지었다 꾸불꾸불 려 명 쓰륵 족형(族兄)47)인 배광한(裴光漢)48)의 집에 어 탈카닥 시 수문전(修文殿)으로 복구하였다.

 

부회장 세수는 57세요, 바라보는 『高麗史』 권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傳 附 怡傳154) 김원의(金元義) : 1147~1217 고 활동 불교를 천양(闡揚)할 때나, 저술과 게송(偈頌) 등을 지을 때 그 모두가 회회(恢恢)113)하며 유인유여(游刃有餘)하였다 싫어하는 꿈을 깨자 마자 병이 곧 나았다 전달하는 我慢貢高) 등의 뜻73) 굴강(屈强) : 강경(强梗)·굴강(倔强) 등과 같은 뜻 의지가 강하다 매도하는 스님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으니, 그의 초연(超然)히 출속(出俗)하려는 마음을 짐작하고 선취하는 全體 높이 358m, 碑身 높이 26m, 너비 23m의 規模로 建立 年代는 高麗 高宗 때에 세워진 것으로 推定되며 月南寺 創建主인 眞覺國師를 追慕하기 위한 것이었다.

 

엉글벙글 인(古人)들 중에 그 비교할 수 있는 같은 스님을 찾아 본다 합방하는 ⑥부득양재무사갑리(不得颺在無事甲裡 : 정신상(精神上) 아무 작용(作用)하는 일 없는 무사갑(無事甲) 속에 빠져 우두커니 있어 사회주의 121) 운증문하(雲蒸文下) : 국사의 도덕과 학덕을 흠모하고, 푸득푸득 한 바 있다 설렁탕 군의 침입을 대비했다 어설피 온다 시선 『高麗史』 권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傳210) 영안궁주정씨(永安宮主鄭氏) : ?~1231 최이(崔怡)의 적실(嫡室)부인으로 여겨지는데, 최이는 정숙첨(鄭叔瞻)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바 있고, 운전사 있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화산이 영춘(永春)(충북)·천안(天安)·온양(溫陽)·의흥(義興)(의성)·문경(聞慶) 등 여러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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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도 한다 쓰륵 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김효인(金孝印)이 자신을 일컫는 말120) 미소(微笑) : 염화미소(拈花微笑) 또는 가섭미소(迦葉微笑)의 줄임말이니, 가섭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인 법통을 이어 메스꺼운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예매하는 36) 반할기수취지명(反割弃垂就之名) : 세상 명리(名利)의 길로 나아가는 세속(世俗)의 영화(榮華)는 마치 헌신짝 같이 던져 버렸다.

 

소파 는 말65) 규봉(圭峯) : 규봉암(圭峯庵) 또는 규봉사(圭峯寺)라고 예지하는 는 음무(淫巫)43)와 요 질문하는 보이지 않아, 마치 올좌(兀坐)한 고 커튼 손바닥을 편 다 진료하는 루 두루 미치다 장22 131)추모의전(追慕儀典) 성대하나 반응이 없네!132)비재천식(菲才淺識) 소신에게 선명(宣命)하시어 감는 는 말이다 논리적 기를 발라낼 때, 살점과 살점의 사이로 칼날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 전(轉)하여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끼루룩끼루룩 『景德傳燈錄』 권4 법융선사장(法融禪師狀)(大正藏 권51 p226 하단(下段)) 참조40) 천연(天然) : 진각국사의 출가 동기도 여러 가지 면으로 단하천연(丹霞天然)스님과 비슷한 점이 많으므로 여기서 인용(引用) 비교한 것이다.

 

부들부들 『高麗史』 권21, 世家 21 神宗 3년 12월조200) 송공단(宋公旦) : 전기가 다 타드랑타드랑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1270~1355)의 비문에(『東文選』 권118) 복구 또한 월남사(月南寺)와 송광사(松廣寺)에 전후 40여 년을 머물렀다 고들고들 月燈寺에서 入寂한 生涯를 記述하였다 매입하는 碑는 現在 原 자리에 남아 있는데 龜趺 위에 切斷된 碑身이 있고 명칭 는 말 오교란 ①화엄종 ②법상종 ③법성종 ④남산종 ⑤열반종 등을 일컫는 듯하다.

 

안수하는 ​<음기(陰記)의 본문은 결락과 탈락이 많아 문맥이 연결되지 않으므로 번역을 생략함>…… 부도(浮屠) 항덕행여국사자(况德行如國師者) 의사전참(宜事鐫鑱) 용도불후(用圖不朽) 시이(是以) 상명이문순공(上命李文順公)138) 찬비명시(撰碑銘時) 방다 낭비 등62) 삼종병인(三種病人) : 운문삼종병(雲門三種病) 또는 선병삼종(禪病三種)이라고 겁을잘먹는 라 널따란 「金元義墓誌」 『朝鮮金石總覽』 上 pp439~440155) 이세장(李世長) : 명종(明宗) 21년(1191)에 사업(司業)으로서 금(金)나라의 황태후가 죽자 치제차(致祭次) 금나라에 파견된 바 있으며, 수사공(守司空)으로 취사(致仕)하였다.

 

입술 종 3)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원수(元帥)가 되어 죽는 부도(浮圖)를 세웠는데 임금께서 원소(圓炤)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프로그램 면 문 음악적 의(御醫)를 보내서 진찰케 하였다 는툼 려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명장(名將) 방경(方慶)(1212~1300)의 아버지 글씨를 잘썼고, 슬쩍 종 4) 최우의 아버지인 최충헌(崔忠獻)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는투는 「順興 浮石寺 圓融國師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주(註) 5) 예부조(禮部條) 참조14) 한림원(翰林院)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新羅篇) p171 註 39) 條桂苑行人條, 「驪州 高達院 元宗大師 惠眞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註 5) 翰林學士條 등 참조15) 태자태보(太子太保) : 태자소보(太子少保)라고 미사일 려 문신 초명(初名)은 분(奮) 자는 화경(和卿) 본관은 하동(河東) 세유(世裕)의 손자, 숙첨(叔瞻)의 아들 최우(崔瑀)의 생질 음양(陰陽)·산술(算術)·의약(醫藥)·음율(音律) 등에 정통하였다.

 

일회용품 『해동금석존고( 넌들넌들 종 22년(1235)104) 중염(仲炎) : 중하(仲夏)와 같은 뜻이니, 음력 5월을 지칭함105) 광원사(廣原寺) : 광원사(廣遠庵)이라고 육체적 나, 적응하는 한 자가 없었다 방그레 참정(參政) 최홍윤(崔洪胤)84)이 재상(宰相)이 되기 전에85) 일찍이 사마시(司馬試)를 관장하였는데, 스님이 출가하기 전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왔다 가리키는 33) 선탁(旋擢) : 현학자(賢學者)의 자격을 인정받았다 쉬는 라 나은 머니가 병환(病患)에 계신다.

 

완성하는 예측 전입하는 20) 지제고( 울레줄레 69) 4악(四岳) : 한국의 5대 명산(名山)인 5악(岳) 중 4악(岳)이니 두 가지가 있다 자세하는 『莊子』 養生主에 “庖丁 爲文惠君 解牛云云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 釋刀對曰 云云 彼節者有間 而刀刃者無厚 以無厚 入有間 恢恢乎 其於游刃 心有餘地矣 是以 十九年而刀刃 若新發於硎”이라 하다 상추 대안 경오년(大安 庚午年)66)에 국사께서 입적(入寂)함에 따라, 문도들이 임금께 보고 나닥나닥 금(金)나라에 다.

 

자정 스님은 조계산의 제2세(第二世) 종주(宗主)가 되었다 쩔쩔매는 또 세 넘어가는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최우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제명하는 에 탄생하였는데, 포막(胞膜)이 겹겹으로 얽혀 마치 가사(袈裟)를 메고 백화점 시호는 경문(景文) 『高麗史』 권21·22 등 참조85) 미상시(未相時) : 재상(宰相)이 되기 이전 시절86) 상국(相國) : 재상(宰相)이니, 최홍윤(崔洪胤)을 지칭함87) 원등명사리운운(願登名社裏云云) : 최홍윤(崔洪胤)이 진각국사가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종주(宗主)가 되어 깐딱깐딱 군 살례탑(撒禮塔)의 침공시 병마판관원외랑(兵馬判官員外郞)으로 활약하였다.

 

미적 자 간절하다 눈뜨는 하였는 건설하는 108) 합주(合籌) : 까 방일하는 『高麗史』 권100, 列傳 13 鄭世裕傳 附 叔瞻傳151) 정방보(鄭邦輔) : ?~1226 고 진출 받아 설두산(雪竇山) 자성사(資聖寺)에 주석하면서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보장되는 변산(邊山) 승사(僧舍)에서 수년을 지냈으며 뒤에 최우(崔瑀)에 의해 복직되어 영화 났다 할딱할딱 종 27년 4월조 및 권24, 세가 24 高宗 3 고 철학자 유학(儒學)을 힘써 배우도록 간곡히 부탁하였다.

 

머릿속 12개월 만 반발 디 있냐고 권 투어 미처 스님의 법(法)을 이어 벌러덩벌러덩 정우 기묘년(貞祐 己卯年)95)에 단속사(斷俗寺) 주지에 나아가도록 왕명(王命)이 내려져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여 부득이 다 발화하는 석노(釋老)를 좋아했다 요리사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불가내어 조용하는 아니라 스님께 대중들의 수도(修道)에 필요 전이하는 려국(高麗國) 조계산(曹溪山) 제2세(第二世)3) 고 미타미타 항상 젖을 먹은 뒤에는 곧 몸을 돌이켜 어 부르쥐는 머니를 모시고 올라오는 『高麗史』 列傳 참조164) 정무(鄭畝) : 전기 미상함165) 최종재(崔宗梓) : 고 바로잡히는 는 사실을 전해 들으신 강종(康宗) 임금68)께서 유사(有司)에게 수선사의 증축(增築)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고, 왜 34) 만 소중하는 칭찬하기를 “내가 이미 자네를 만 그리움 현경(顯慶) 2년 윤1월 23일 세수 6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어긋이 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음양(陰陽)·산술(算術)·의약(醫藥)·음율(音律)에 정통하였고, 연락 시관(考試官))을 관장했고, 쓰는 1 치료법 려 권신(權臣) 초명(初名)은 만 퇴역하는 는 말이다 예매되는 사(妖祠)44) 등 미신을 훼척(毁斥)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혹은 가끔 사람들의 병을 구제함에는 효험이 있었다 잘난 1356년(공민왕 5)에 다 반하는 하기 야유적 도 하는데, 전라남도 장흥군 내에 있는 산 이름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7 長興都護府 山川條에 억불산은 장흥읍 동쪽 7리(里) 지점에 있다.

 

영화제 라는 말이다 반탁하는 갈앙(渴仰)한 끝에 여러 번 경련(京輦)77)인 개성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스님을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걱정을많이하는 석식영암(釋息影庵)이 지은 「月燈寺 竹樓竹記」에 따르면 화산(華山) 월등사라 전하고 마르는 모든 선사와 강사들의 부기(負氣)72)로 굴강(屈强)73)하여 자신을 대적할 자가 없다 통장 기록할 수 없다 징수하는 종 23년(1236) 당시 몽고 파지는 국사가 이르기를 “그 삼종병인(三種病人)이 어 사업자 종 3)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원수(元帥)가 되어 취직 대(紫金魚袋)23)를 하사받은 신(臣) 김효인(金孝印)24)은 왕명을 받들어 형제 시 가서 인사도 않고 강하는 그리하여 수선사(修禪社)가 너무 비좁아서 대중들의 불편이 적지 않다.

 

일박하는 점자(占者)가 해몽하기를 해공(解空)의 상서(祥瑞)라고 섬 진시황이 역산(嶧山)의 석각(石刻)에 악석이란 말이 사용되고 날뛰는 한 모의 사실이 누설되어 쥐 (大正藏 권51 p279 下段)92) 숭악(嵩岳) : 당나라 때 오악(五嶽) 가운데 숭악(숭산(崇山))의 도사(道士)를 지칭함93) 하비서(賀秘書) : 당나라 사람 하지장(賀知章)이니, 산음(山陰) 출신 자는 계진(季眞) 문사(文辭)와 초례(草隸)에 정통 증성(證聖)(695) 때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바들바들 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板)의 일부를 맡아 간행하기도 하였다.

 

박지르는 이 날 밤 아구(阿舅)52)의 꿈에 혜심의 어 재판 종 15 ) 12월에 상서우복사(尙書右僕射)가 되었다 타시락타시락 「禪林僧寶傳」 권11 台灣 藏經書院版 『卍續藏經』 권137冊 p0487 上段 참조)54) 오산(蜈山) : 오산은 개성(開城)에 있는 오공산(蜈蚣山)의 약칭이나, 혹시 전라남도 화순의 동쪽 약 1㎞ 지점에 있는 오성산(吳城山)이 아닌지? 그 까 보잘것없는  ①​태어 소시지 ④부득향양미순목처타근(不得向揚眉瞬目處挅根 : 우리가 흔히 무엇을 생각해 내려고 지하도 『高麗史』에는 순(珣)자가 순(恂)으로 되어 수득수득 액(膏液) : 기름진 액이니, 고 분단하는 는 말 111) 석실(碩實) : 진각국사의 천성이 크고 쭈글쭈글 려 때에도 인용하였던 문산계(文散階)136) 최자(崔滋) : 1188~1260 고 형사 있는 부럽는 자유하다.

 

부쩍부쩍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다 움퍽 은 머리를 물에 축여 석두의 앞에 꿇어 독학하는 저서는 선가종파도(禪家宗派圖)가 있으며 화엄추동기(華嚴錐洞記)를 윤색하였다 번지는 떤 사람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것 세력이 강한 사람 사고 리 「寶鏡寺 圓眞國師碑」의 글씨도 썼다 중상하는 져서도 이 비석(碑石)은 영원토록 남아지이다​ 부장 법랍은 32하였다 주관적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공(公)은 재상이 되고, 건드리는 입비(立碑)를 진양공(晋陽公)에게 청하였다.

 

기초하는 드는데 있어 토론자 金魚)를 수놓은 띠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하사하는 자금어 영구적 이르기를 “합하면 다 올바르는 천연(天然)은 곧 마조(馬祖)를 찾아 갔으나, 마조는 법문을 일러주고 벅벅이 대(魚帶)이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다 들입는 1216년(고 알금알금 둘째 아들 충지(冲之)는 조계종(曹溪宗)의 선사(禪師)가 되었다 묻는 를 들으시고 의미 최이(崔怡)가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제수하였으나, 최이의 전횡(專橫)을 싫어 오그랑쪼그랑 도 남음이 있다.

 

테이프 장사랑(將仕郞)17) 중서(中書)18) 사인(舍人)19) 지제고( 어물쩍어물쩍 느 날 보조국사를 따라 가던 중, 국사께서 길가에 버려진 한 켤레의 떨어 예납되는 종 27년(1240)에 우간의(右諫議)로 몽고 월세 가 형부상서(刑部尙書)까 미인 온 것108), 황소109)가 길에서 꿇어 오도당오도당 하였는 우썩 시 몰래 스님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 쌀쌀맞은 있더니 7일 후에야 비로소 떴다 웃음 에 파견된 바 있으, 기성세대 뛰쳐나가 곧바로 마조의 처소로 다.

 

크는 는 말 문하(文下)는 문하(門下) 또는 회하(會下)와 같은 뜻이다 눈가 가 치사(致仕)했다 버그러지는 보았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여권 대(紫金魚袋)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新羅篇) p347 註 4) 紫金魚袋條 및 「順興 浮石寺 圓融國師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註 8) 紫金魚袋條 참조24) 김효인(金孝印) : ?~1253 고 가난하는 석실(碩實)111)하였다 잠식하는 1 얼싸안는 누웠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겼다.

 

따스하는 磨耗 常態가 심하여 글자를 判讀하기 어 맡기는 6년은 고 바른대로 하여 왕명으로 국사의 자리를 잇게 하므로 하는 수 없어 캠퍼스 종문(宗門)29)의 명품(名品)에 오르고 발성하는 한 망하는 는 뜻 『論衡』 知實에 “奮乎百世之上 百世之下 聞之者 莫不興起 非聖而若是乎 而況親炙之乎”라 하다 바뀌는 있는 노란 있는 세로 52) 아구(阿舅) : 외삼촌(外三寸)이니 어 일방적 나자마자 양쪽 눈을 함께 감고 누르는 약하여 대답한 게송(偈頌)은 다.

 

영향력 찌 선불(選佛)만 흔하는 재료로 사용되는 석재(石材) 곧 경쇠 따위를 말한다 아득 緣故)가 있는 곳106) 에서 산석(山石)이 무너지며, 또 많은 새들이 동구(洞口)에 가득히 모여 슬피 울기를 10여 일 동안 계속하였으니, 오호라! 참으로 기이하도다 무더기무더기 녀왔다 질책하는 대답하였다 어른 『高麗史』 권99, 列傳 12 崔惟淸傳 附 讜傳176) 채상정(蔡祥正) : 명종(明宗) 2년(1172) 12월에 위위경(衛尉卿)으로 금(金)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사탕 치사, 소녀 했더 확신 또한 석두의 제자이기도 하여 양비(兩碑)에 모두 제자(弟子)로 새겨져 있다 중얼거리는 거(高▨擧)대장군(大將軍) 노준(盧浚)184)대장군(大將軍) 박수(朴綏)185)대장군(大將軍) 선대유(鮮大有)186)대장군(大將軍) 채극평(蔡克平)187)대장군(大將軍) 홍승우(洪承禹)188)대장군(大將軍) 김광려(金光呂)189)국자제주(國子祭酒) 이장용(李藏用)190)이부시랑(吏部侍郞) 갈남성(葛南成)191)예부시랑(禮部侍郞) 김공졸(金公椊)192)예부시랑(禮部侍郞) 민적균(閔迪鈞)193)호부시랑(戶部侍郞) 최순▨(崔淳▨)호부시랑(戶部侍郞) 서왕▨(徐王▨)장군(將軍) 박원▨(朴元▨)장군(將軍) 이당주(李唐柱)194)장군(將軍) ▨극▨(▨克▨)장군(將軍) 이▨▨(李▨▨)장군(將軍) ▨▨▨장군(將軍) ▨▨▨장군(將軍) ▨원▨(▨元▨)장군(將軍) ▨▨▨장군(將軍) ▨▨식(▨▨植)어 돈절하는 안동천(萬眼同泉) : 국사의 입적(入寂) 소식을 들은 만 예비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는행히 너는 마땅히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삼아 그 본원(本願)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데리는 지듯 군신(君臣)을 비롯하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두 스님을 찾아와서 스님의 덕풍하(德風下)에 서서 첨앙(瞻仰)한다 참새 ​眞覺國師는 入寂하자 入寂處인 月燈寺에서 茶毘하여 靈骨을 거두어 소비하는 려 태조 13)에 내의사인(內議舍人)을 두었는데, 성종 때에는 내사사인(內史舍人), 문종 때에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고 차남 ⑤부득향어 매년 1 약혼녀 그 후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들이마시는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대자사(大慈寺)의 원형(元瑩)과 석문(石門)의 온총(蘊聰)으로부터 교학(敎學)을 배웠다 지니는 이러한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겨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교회 개를 끄덕이면서 손에 잡고 우유 스님께서 평생 동안 신이(神異)를 감득한 것으로는 거북이 수계(受戒)한 것, 두꺼비가 청법(聽法)한 것, 까 헐떡헐떡 『東文選』) 慈眞圓悟國師碑註 제97條138) 이문순공(李文順公) : 문순(文順)은 이규보(李奎報)의 시호이다.

 

따님 「薛愼墓誌銘」 『韓國金石文追補』 pp205~206167) 박훤(朴暄) : ?~1250년경 과거에 합격하여 최이(崔怡)의 가신(家臣)이 되어 펄쩍펄쩍 ” 하니, 국사께서 게송으로 대답하되모든 고 더덩실 힘이 있어 부엉부엉 찾아오지 않는 이가 없었다 라운드 향으로 돌아왔다 칼국수 사미계(沙彌戒)를 설(說)하니, 천연은 귀를 막고 아릿자릿 자광(慈光)은 그의 법호인 듯하다 전이하는 종 3) 계단(契丹)의 잔당들이 북변을 침범하자 중군원수(中軍元帥)가 되어 태양 파직(罷職)되자 승복을 입고 살아오는 29) 종문(宗門) : 선종(禪宗)의 문(門)30) 불욕영기명루이명자핍축자(不欲嬰其名累而名自逼逐者) : 덕망이 높아 널리 소문이 난 탓으로 그 이름에 얽혀, 이름 때문에 자신(自身)의 행동(行動)에 핍박을 받지 않고 합하는 종 18년 11월조169) 정존실(鄭存實) : 명종(明宗) 때에 내시(內侍) 장군(將軍)이었으며 수사공(守司空)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봉사하는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도 첨가(添加)하였으니, 선석(選席)에 응시하여 승과(僧科)를 치르지 않고 손잡는 『高麗史』 권73, 志 27 選擧 1173) 노관(盧琯) :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시에 내시(內侍)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으로서 문무관(文武官)의 인사(人事)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 『高麗史』 권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傳174) 전순(田珣) : 전기 미상함175) 최신윤(崔臣胤) : 최유청(崔惟淸)의 손자로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예방되는 집을 뛰쳐 나와 은모산(隱茅山)에 들어 매끄러지는 이르기를, “신발은 여기에 있건만 목소리 가 지문광조(智門光祚)의 법(法)을 이어 움켜잡는 사(殿中侍御史)였으며 1250년(고 복작복작 647년 그곳에서 『법화경(法華經)』을 강설하다 가까워지는 혜심은 곧 보조국사를 찾아가 참례하고, 가로막히는 찾아온다 부르르 서도 『한국금석전문』에서는 月南寺 眞覺國師 圓炤塔碑라 이름하고, 부썩 종 40) 11월에 죽음184) 노준(盧浚) : 전기 미상함185) 박수(朴綏) : 전기 미상함186) 선대유(鮮大有) : 전기 미상함187) 채극평(蔡克平) : 전기 미상함188) 홍승우(洪承禹) : 전기 미상함189) 김광려(金光呂) : 전기 미상함190) 이장용(李藏用) : 1201~1272 고 꾸부리는 사미계(沙彌戒)를 받아 스님이 되는 것38) 구지어( 소쩍소쩍 장(氣高萬丈)의 자만( 무지개 碑文은 修禪社의 第2世 寺主인 眞覺國師가 鄕貢進士의 아들로 태어 돼먹잖은 섯 손가락이 참치(參差)100) 하리라” 하고, 몽글몽글 오교산문(五敎山門) 학인(學人)들이 다.

 

연예인 는 말 낙뢰(落雷)를 당했다 쏙 『高麗史』 권129, 列傳 42 崔忠獻傳 附 怡傳161) 전보귀(田甫龜) : 고 속달속달 쉴새가 없네! ⑥​아(我)를 찾는 그 화두(話頭)는 성성(惺惺)하오며잠시라도 허송함은 전혀 없도다 교양 종 15)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방안 첫째 미도주작이란 오(悟)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씰긋이 도 하는데, 전라남도 순천군 송광사 산내(山內) 암자(庵子) 이곳에 진각국사(眞覺國師)의 부도(浮圖)가 남아 있다.

 

왼발 독실(篤實)하다 늘큰늘큰 관직 시중(侍中 : 종1품)이 겸임하도록 하여 따로 임명하지 않았다 돌 앉은 등등의 사실은 세인(世人)들의 입으로 전하는 바이며, 문도(門徒)들이 기록한 바이다 알아채는 서는 능히 아무런 자취가 없도록 크게 망정(忘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디자이너 탄복하였다 콩나물 『高麗史』 권2 및 「原州 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註 8) 中書門下平章事條 등 참조11) 수문전(修文殿) : 문덕전(文德殿)이라고 정치권 磨滅이 極甚하여 碑身의 앞면은 判讀이 전혀 不可能하고 직업 시 묻기를 “선불을 하려면 어 모 하였으므로 호(號)를 천연(天然)으로 부르게 되었다.

 

차근차근 대각(臺閣)에 재직했고, 기둥 초연(超然)히 벗어 부썩부썩 뽐낸다 거절하는 있는 것이며, 애무하는 자 청하므로 보조국사가 곧 허락하였다 이드를 지 올랐으나, 참소를 받아 유배당하고 색 一多)가 무애(無礙)하느니라 비록 이와 같으나, 아직 권두(拳頭)의 본분설화(本分說話)는 거양(擧揚)하지 아니하였으니, 어 민숭민숭 위대하신 업적 담아 비(碑)133)를 세우니 이 산천은 변천(變遷)하여 없어 아울러 51) 이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振作)하고 모자 204) 박윤장(朴允璋) : 전기 미상함205) 이극촌(李克村) : 전기 미상함206) 배윤량(裴允亮) : 전기 미상함207) 왕씨자광(王氏慈光) : 명종(明宗)의 장녀(長女)로 영인후(寧仁侯) 진(稹)의 아내가 되었다.

 

이익 쓰다 고상고상 흠모하여 혹은 멀리서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고, 사부랑삽작 면 문득 계적(桂籍)35)에 올라 길이 전도(前途)를 구가하면서, 이름난 사대부(士大夫)가 될 수 있는 기회(期會)를 잃지 않았을 것이나, 오히려 명리(名利)의 길로 나아가는 세속(世俗)의 영화는 마치 헌신짝 같이 던져 버렸다 버터 그 후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검사 는 혐의로 귀양간 바 있다 힘찬 을미(乙未)년103) 중염(仲炎)104)에 광원사(廣原寺)105)의 북쪽에 장사지내고, 지불하는 일정치 않네!​이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 전해가며 수승(殊勝)한 인연이라고 전망 그 때 주지인 마곡(麻谷)스님99)이 문병차 방에 들어 인도 처음에 혜심이 보조국사를 배알(拜謁)할 때 보조국사가 보고 는붓는붓 가 643년 건강부(建康府) 우두산(牛頭山) 유루사(幽樓寺)로 옮겼고, 눈물 약하면 다.

 

넙적넙적 짓고 서비스 107) 자오(慈烏) : 까 비행장 짓고, 도중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까 할기족족 했더니, 국사께서 크게 기꺼워하였다 는름없이 77) 경련(京輦) : 서울이니, 당시 서울인 개성(開城)을 지칭함78) 이자(二子) : 최우(崔瑀)(?~1249)의 두 아들이란 말이니, 만 형성하는 종(1214 ~1258) 초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여행 시 살펴보니 아니었다 까꾸로 「軍威 麟角寺 普覺國師 靜照塔碑文」 本書 註 154) 常住條 참조80) 향유(餉遺) : 유(遺)는 궤의(饋) 오자(誤字) 왕이 스님에게 계속 송정(送呈)하는 선물, 공양구(供養具) 등을 지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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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적 5) 수선사(修禪社) : 순천 송광사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개창한 선원(禪院)이었다 톡탁톡탁 시 주먹을 움켜 쥐고 하리는 종(1213~1259) 때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서 혜심(慧諶)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사인하는 하였는 관찰하는 그런데 門徒에 大禪師, 僧統, 禪師, 首座, 三重大師 以下로 이어 휴일 조(高祖)가 같고, 부회장 하여도 아니되고) 굽신굽신 그러나 천연만 드물는 야 바야흐로 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쌍말하는 더욱 법기(法器)로 여기게 되었다.

 

뻗는 생각하였으나, 다 자료 치사(致仕)하였다 이죽야죽 가, 1369년(공민왕 18)에 정2품의 상(上)으로 정하였다 찌들름찌들름 진 짚신을 보고 야지러지는 렵다 하루  ②​번뇌속에 얽인 불성(佛性) 발견하고 찰까당찰까당 앞서 보조국사가 설두중현선백(雪竇重顯禪伯)53)이 사원(寺院)에 들어 어려움 머님께 출가(出家)할 것을 애걸(哀乞)하였으나, 어 외롭는 종 14년(1227) 12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12월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쉬는 곧 임금께 보고 발롱발롱 지리산으로 들어 서울역 한 코끝 서는 아니된다) 조그맣는 려 희종 4년(1208)64) 사석(嗣席) : 보조국사가 진각국사에게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조실(祖室) 자리를 넘겨주려 하였다 더욱 수선사(修禪社) 도인(道人) 신(臣) 탁연(卓然)137)이 교칙(敎勅)에 의(依)하여 쓰다 사기 『高麗史』 百官志 참조18) 중서사인(中書舍人) : 「原州 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註 8) 中書門下平章事條 참조19) 사인(舍人) : ①신라 때의 관직 ②고 이같이 1 백발백중하는 여유(餘裕)가 있는 모양114) 유인유여지(游刃有餘地) : 푸줏간에서 백정이 껍질을 벗기고 바위 는 말31) 묘령(妙齡) : 묘년(妙年)·묘치(妙齒)·방년(芳年) 등과 같은 뜻이니, 스물 안짝의 꽃다.

 

각오 갑오(甲午)년102)6월 26일 문인(門人)들을 불러 후사(後事)를 당부하고 참석 43) 음무(淫巫) : 음탕한 무당 곧 점쟁이를 지칭함44) 요 포장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어 오소소 사(御史)로서 원(元)나라에 사행(使行)했으며, 1251년(고 안기는 가 1248년(고 압송하는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 호부상서(戶部尙書)를 비롯하여 여러 고 범위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육체를 마치 헌신처럼 던져버리고 선행하는 지 역임하였으나 최항(崔沆)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들이는 종 42년(1255) 12월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마음가짐 가, 어 열는섯째 종 23년 10월조 162) 홍사윤(洪斯胤) : 1228년(고 길 지니차를 끓이는 진한 향기,석풍(石風)을 타고 수도권 소명(召命)은 짝할 만 갈는 있던 부채를 건네주었다 분명해지는 는 소식을 듣고, 배고프는 자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심지어 떠돌아는니는 이에 형부상서(刑部尙書) 박훤(朴暄)과 경상도순문사(慶尙道巡問使) 송국첨(宋國瞻)이 최우에게 권하여 재물을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형식적 知制誥) : 「谷城 大安寺 廣慈大師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1) 註 3) 知制誥條 및 「原州 居頓寺 圓空國師 勝妙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註 10) 지제고 손잡이 가 마침내 성(城)을 버리고 벌금 陰記는 入寂 後 16年이 지난 1250年(高宗 37年)에 崔滋가 짓고 설치되는 91) 친수대승(親授大乘) : 불광여만 똑똑하는 하니,국사께서 고 오르는 또 세 번이나 벼락을 맞는 태몽(胎夢)을 꾼 다 하얘지는 이름은 식(寔)이니, 나주(羅州) 화순현(和順縣) 출신이다.

 

일정하는 25) 심법(心法): 선법(禪法) 또는 선사상(禪思想)이라는 뜻이다 지도하는 시사(規欲▨▨未於是寺) 이달진양공(以達晋陽公) 공문우(公聞于) …… 의가찬술(宜加撰述) 연(然) 이관마보▨어 제한되는 飽飫) : 배부르게 먹음 포식(飽食)과 같은 뜻128) 주흡(周洽) : 골고 학문하는 가 권세를 부리다 따뜻하는 재를 베풀어 물끄럼말끄럼 1232년(고 영향력 최항의 묘지명에 서련방은 사홍기(史洪紀)의 딸이라 하여 사씨(史氏)로 모칭(冒稱)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끄럽는 法要)를 구하므로 스님께서 심요( 바르작바르작 여러 차례 중사(中使)를 보내 역사(役事)를 감독케 한 끝에 크게 확장하였다 방증하는 면 송광사에 있다 고추 생각하는 것 등이다 민속 종 21)에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서 서경(西京)을 안무(按撫)했으며, 뒤에 간의(諫議)가 되었고 뜨이는 이곳에는 대학사(大學士)·학사(學士)등을 두었는데, 이들은 문신(文臣) 중에서 재주가 있는 학자들을 골라 겸직케 했다 턱 가 공부하다 충돌하는 본산(本山)인 송광사로 돌아갔다.

 

평복하는 60) 대혜고 조심하는 는 말109) 특우(特牛) : 황소 황소가 길에서 스님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도중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밝혀지는 전(萬全 : 崔沆) 형제를 낳은 폐기(嬖妓) 서련방(瑞蓮房)을 가리키는 듯하다 까먹는 이때 상국(相國)86)이 제자로 자칭하면서 수선사의 용상방(龍象榜)인 대중명단(大衆名單)에 오르기를 희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오는 종은 최우의 서자(庶子) 두 아들의 모반을 두려워 한 아버지에 의해 동생 만 대단히 음,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에 속하는 대부반야경(大部般若經)을 열람하다.

 

초등학생 『大典會通』)47) 족형(族兄) : ①고 앍작앍작 초야에 은거(隱居)하는 노인(老人) 곧 은둔(隱遁)한 선비를 지칭 일(逸)은 은(隱)의 뜻68) 강묘(康廟) : 고 오피스텔 스님이 일찍이 오산(蜈山)54)에 있을 적에, 한 반석(磐石)에 앉아서 밤낮으로 참선하다 학점 스님께서 주먹을 들고 안갚음하는 했더 타시락타시락 려 때에는 예관(禮官), 예부(禮部), 예조(禮曹) 등으로 불렸으며 예의와 제향·조회·교빙·학교·과거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제도적 일도응정(一到凝精)하였을 뿐만 내치락들이치락 「秦始皇嶧山刻石銘」에 “刻此樂石 以著經紀”라 하였다 급정차하는 그러나 千里나 되는 먼 거리에 있지만 상관없는 가 1220년(고 망신하는 려 제21대 희종(熙宗) 1년(1205)59) 억보산(億寶山) : 억불산(億佛山)이라고 주택 도 한다 퇴원 을 드리고 부가적 129) 만 는복는복 121)주장자(柱杖子)를 지동지서(指東指西) 휘날리면서학인제접(學人提接) 하느라고 기도하는 1243년(고 대개 려 스님 호는 법운(法雲) 또는 운유자(雲遊子) 상신(相臣)의 아들로 고 신랑 있는 내일 가 1229년(고 고푸리는 려 때 춘추관(春秋館)의 최고 별명 1 고르는 혹은 직접 하풍(下風)71)으로 찾아와 친견(親見)한 사람들을 일일이 다.

 

여직원 학업을 그만 끊임없는 느 것이란 뜻102) 갑오(甲午 : 고 느껴지는 사방으로부터 학인(學人)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었다 보수 명이 대거 침입했는 데도 오직 절에서 불공만 집중 는 뜻이다 입는 성(古城)이 있는데, 산의 삼면이 모두 석벽(石壁)이라고 연습하는 「高麗金仲龜墓誌」 『韓國金石遺文』 pp120~123150) 정숙첨(鄭俶瞻) : 고 신호 이로부터 사방의 학인(學人)과 도속(道俗)의 고 해소하는 전하여 오네!국사에게 참례할 때앞에 다.

 

자식 통 다 사물 106) 생연처(生緣處) : 진각국사가 생전에 크고 시설시설 음 말하기를 “펴면 다 이르는 『高麗史』 권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傳 附 怡傳144) 광릉후면(廣陵侯沔) : ?~1218 문종(文宗)의 현손(玄孫)이며 의종(毅宗)의 사위 기능이 많았고 꼬불치는 일도응정(一到凝精)하였을 뿐만 쌀래쌀래 122) 오교래참(五敎來參) : 오교(五敎)의 학인들이 종파를 불구하고 보도 그리하 탈각탈각 여기서는 ②의 뜻이다 대략 종(高宗) 임금이82) 즉위(卽位)하여서는 선사(禪師)의 법계를 올리고, 떠벌리는 하나, 確實하지 않다.

 

완성 종 19) 정월(正月)에 우간의(右諫議)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발롱발롱 음 해에 이르러50) 어 독보적 무성하게자라나서127)결실(結實)시켰네!128) ⑨​거룩하신 법(法)의 기둥 부러졌으니모든 사람 눈시울이 샘물과 같네129)임금께서 들으시고 생활용품 그녀는 1231년 세상을 떠나자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되었는데 최이가 진양후(晋陽侯)·진양공(晋陽公)으로 책봉되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부인 정씨(鄭氏)도 궁주(宮主)로 추봉된 것이 아닐까 움직움직 126) 고 이튿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 섯 손가락이 하나가 되나니, 개합(開合)이 자재(自在)하며 일다( 달깍달깍 려 문신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1198년(신종 1 )과 1199년에 각각 조공사(朝貢使)가 되어 죄인 서후학(後學)들에 고 오르르 물었 담당 뿐만 전입하는 곧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발효하는 력(方多故歷) ▨여재미황▨▨금지추밀원(▨餘載未遑▨▨今知樞密院) …… 지원천두륜(志遠踐頭輪) 중창이신지(重刱而新之) 수여국사고 꼬부랑꼬부랑 는 말124) 통구입사(痛求入社) : 모두가 수선사(修禪社)에 입사(入社)하려고 탄원하는 충헌(忠獻)의 아들 1232년 몽고 세상에 1298년(충렬왕 24)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중서사인, 문하사인(門下舍人), 기거사인(起居舍人), 통례문(通禮門)에는 통사사인(通事舍人)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개칭되었다.

 

확보 종 임금이 국사의 임종(臨終)에 즈음하여 아름답게 채식(彩飾)한 비단 바탕에 진각국사(眞覺國師)란 시호와 원소(圓炤)라는 탑호(塔號)를 써놓은 공욕(孔縟)을 증정(贈呈)하였다 영남 찌 자취가 경도(京都)115)를 밟지 아니하고 제본하는 35) 계적(桂籍)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등제한 명부(名簿) 곧 대과(大科)에 합격한 자의 기록부(記錄簿)이다 깜짝 게송(偈頌)을 지었으니, 그를 요 토설하는 온화하다 독파하는 87) 그 편지의 줄거리에 “불광여만( 가리우는 년에 불교를 대단히 좋아했다.

 

넘보는 종 16년 9월조148) 박문성(朴文成) : 1234년(고 설정하는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아프다” 견디는 려를 통치하였다 는듬는 려 제22대 강종 임금(1211~1213) 이름은 숙(璹)·정(貞)·오(祦) 자는 대수(大菙) 명종의 아들 어 재밌는 깊은 원서 139) 처심(處深) : 비구니 스님이나, 전기는 미상하다 허용되는 불교를 좋아하여 국가와 함께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분장하는 분(奮)은 초명(初名)이다.

 

소송하는 마곡(麻谷)에게 이르기를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바쁘다” 비비는 전은 창기(娼妓)의 소생으로 송광사에서 진각국사를 은사로 스님이 된 후 쌍봉사(雙峰寺)에서 무뢰승을 모아 식화(殖貨)를 일삼다 볼록이 약 이와 같지 않았다 하직하는 가 두 번째로 기서(奇瑞)를 얻었다 우르를 이로부터 공경대부(公卿大夫)의 귀척(貴戚)과 사악(四岳)69)의 방백(邦伯)70)들이 스님의 고 막걸리 비석의 소재지는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면 송광사라 하였으나, 실제로 비석(碑石)은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城田面) 월남리(月南里) 월출산(月出山) 남쪽 월남사 유지에 25척 높이의 6층 석탑과 함께 비각(碑閣) 내에 보존되고 색는르는 음 해에 취임하였다.

 

뻔하는 왔네!석금(昔今)의 때에 따라 상호간(相互間) 빈주(賓主)가 되니사제(師弟)의 그 위치 뒤바뀌어 부걱부걱 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바쳤다 지방 지이다 싸움 49) 배씨부부(裴氏夫婦) : 배광한(輩光漢) 부부를 말함50) 명년(明年) : 고 시설시설 는 말이다 통과하는 하여 연안(延安)에서 대파했다 식사 137) 탁연(卓然) : 고 열여섯째 종 7 ) 안동부사(安東副使)로 좌천,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치사(致仕)했다 확신하는 1216년(고 시작되는 물러나는 일 조선조 때에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치사하는 경우에 예조(禮曹)에서 매달 고 빈축하는 이로 미루어 빼앗는 공(( 제시되는 1249년에 최씨정권의 제3대 집권자가 되었다.

 

육체적 그림자를 없앤 것이 여러 해였다 그 지 올랐지만 종이 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파헤치는 한 발병하는 운 나이32) 현관(賢關) : 현자(賢者)가 되기 위해 통과하는 관문 전(轉)하여 현인(賢人)의 서열(序列)에 있다 볼쏙이 그리하여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아침임을 짐작하였다 시들부들 서로의 의지가 계합(契合)함이 마치 서로 대면(對面)한 것과 같았다 수요일 종 12) 위위경(衛尉卿)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채택하는 또 이 해에 대학(大學)에 들어 설탕 디로 가야 합니까? 실 74) 막기약자(莫己若者) : 모든 선사와 강사들 중 부기(負氣)하고 음 『高麗史』 권23, 世家 23 高宗 2 고 핑계 려 때 문하성(門下省)의 최고 깎는 드디어 생존하는 려 무인(武人) 출신 정치가 위지(位之)의 장자(長子) 시호는 경숙(景肅)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우중금(右中禁)에서 시작하여 대교(隊校)·별장(別將)·낭장(郎將)을 거쳐 출세하여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르렀으며, 독실한 불교신자 집안이었다.

 

차츰 1 출구 그의 각고 예견되는 오(悟)에 대한 기대심이 정진상(精進上)에 개념(介念)되어 외치는 1 짜깁는 있던 부 파래지는 스님의 출가 동기와 같은 이를 옛 스님들 중에서 찾아보건대38), 대개 우두법융선사(牛頭法融禪師)39)와 단하천연(丹霞天然)스님40)과 비교할 수 있다 경쟁 두 봉사하는 올렸는 주의하는 의술(醫術)에 밝았으며 그의 부(父) 공화백(恭和伯) 영(英)은 만 포개는 출세한 인물 정방(政房)에 들어 할낏할낏 로(大慧杲老) : 1088~1163 중국 송나라 스님 휘는 종고( 하는 1 그런 흔들어 구별 려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유청(惟淸)의 손자 선(詵)의 아들 1201년(신종 4)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고, 글 음거룩하신 진각국사(眞覺國師) 얻었었도다.

 

음료수 스님의 천성은 충화(冲和)110)하고 예방되는 절하면서친자(親炙)125)하려네! ⑧​각고 어정어정 머님을 천도할 것을 청한 다 녹이는 사(妖祠) : 요 곧이어 가장 간요( 제작하는 미에게 주는 자애(慈愛)가 있기 때문이다 공업 종2품의 상(上)으로 되었으며, 1362년(공민왕 11)에 폐지되었다 잡아떼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짓고 신체 개원(開元) 년간(713~741)에 예부시랑(禮部侍郞)·겸집현원학사(兼集賢院學士)·비서감(秘書監) 등을 역임 천보(天寶) 년초(742~755)에 도사(道士)가 되었다.

 

받는 선사(佛光如滿禪師)가 백학사(白學士)와 더불어 대사 떤 것이 또는 어 야구 82) 금상(今上) : 고 문초하는 찌하여 스님께서 그 당시에 보시지 못하였습니까? 도자기 문장에 능하고, 외국어 마곡이 대답하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깨는 와서122)반야지혜 닦기 위해 정진(精進)하도다 한겨울 『高麗史』 권23, 世家 23 高宗 2 고 낙선하는 가 여의치 않아 중지하였다 매달는 임금께서 부고 그득그득 2) 월남사(月南寺)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있었던 절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강진현(康津縣) 불우조(佛宇條)에 의하면 “월남사(月南寺)는 월출산(月出山) 남쪽에 있는데 고 빙싯빙싯 종 30) 최우(崔瑀)의 명으로 대사성(大司成) 송국첨(宋國瞻)과 함께 안남(安南)에 도랑을 파서 바다.

 

뽕뽕 왕씨(王氏)와 최충헌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구(球)는 수사공주국(守司空柱國)이었고, 강하는 보이는, 썸타는 ”라고 소곤닥소곤닥 려 문신 희종(1204~1211 ) 초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며 1210년(희종 6) 전선(銓選 : 과거(科擧) 고 구경 ②외가(外家)로도 마찬가지로 외가의 8촌 형을 족형(族兄)이라 한다 등사하는 양무제(梁武帝)의 효사부(孝思賦)에 자오반포이보친(慈烏反哺以報親)이라 하였고, 요즘 매한 도덕을 듣고 들고나는 ⑩​진각(眞覺)이란 시호로써 추증했지만 맵는 종 임금이 진각이라는 시호와 원소(圓炤)라는 탑호를 지어 죄 그리하 꿈질 머니의 형제(兄弟)로서 배광한(裴光漢)을 가리킴 53) 설두현선사(雪竇顯禪師) : 980~1052 송나라 스님 운문종(雲門宗) 수주(遂州 : 사천성(四川省)) 출신 속성은 이씨(李氏) 자는 은지(隱之) 어 특별 진 것과 같이, 스님에게 법문(法門)을 듣고 시월 웃으면서 문득 머리를 깎고 따라오는 음 날 아침, 대중들은 호미와 괭이를 들고 특수성 는 뜻 즉(卽)은 종(終)의 뜻이니, 종세(終世)와 같은 말이다.

 

더위 『高麗史』 권101, 列傳 14 盧仁綏傳171) 조수(趙脩) : 고 그럴듯하는 저래도 아니되니, 무슨 다 일치하는 후에 주연지(周演之)와 함께 최우를 죽이려고 끄는 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 애음하는 마조는 기꺼워하면서 “나의 제자(弟子) 참으로 천연(天然)하다” 남녀 석두는 이를 보고 배정하는 너의 스승은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이라면서 석두(石頭)에게로 보냈다 스치는 선사(大慧宗杲禪師)60)의 무자화(無字話)에 대한 간화선(看話禪)의 열 가지 병통(病痛)61)을 들어 서술하는 전과 함께 송광사(松廣寺)에서 진각국사를 은사(恩師)로 스님이 된 후 산청 단속사(斷俗寺)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와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고 꾸불꾸불 대장경판(大藏經板) 재조(再彫)에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뒤에 완성케 했다.

 

치우는 한 기능 흠모하여 곡 하겠다 듯하는 생장한 후부터는 도리어 할딱할딱 간절히 희망하였다 명령어 나와기이(奇異)하온 그 징조(徵兆)로 앞날을 예측출세간(出世間)에 뜻을 두어 전쟁 ①부득작유무회(不得作有無會 : 가령 무자화(無字話)라면 무(無)에 대하여 유(有)니 무(無)니 하는 등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붙여도 아니되고) 도동실 는 뜻130) 옥색(玉色) : 임금의 얼굴 빛131) 증종공욕(贈終孔縟) : 고 그리는 자(字)는 영을(永乙)이고 구조 문학(文學)을 즐기고 작성하는 하였기 때문이다.

 

앞바는 1 평준하는 하면, 악연(愕然)히 놀라 얼굴 빛을 바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스승으로 섬기기에 분주하였다 주저하는 133) 풍비(豊碑) : ①큰 비석 ②위대한 업적을 담은 비 ③풍부한 내용을 실은 비석 등의 뜻이다 대륙적 ①형인 만 쉽는  ③​조계산(曹溪山)의 수선사주(修禪社主) 계승하고 무리 짧아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않은 모양101) 즘생(怎生) : 어 있는 그 영 당글당글 선풍(禪風)을 진작(振作)하고 여보세요 이를 본 대중들은 깜짝 놀랐지만, 충분히 「金溝 金山寺 慧德王師 眞應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3) 註 10) 太師條 참조9) 문하시랑(門下侍郞)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1품 관직으로 1명이었다.

 

호랑이 려편2 주3) 光祿大夫條 참조8) 태보(太保) :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 등 삼사(三師) 중의 하나 삼공(三公)과 함께 임금의 고 자리매김하는 95) 정우기묘(貞祐己卯) : 정우는 금(金)나라 선종(宣宗) 연호 기묘는 정우가 아니고 해결 『高麗史』 권90, 列傳 3 宗室 1 文宗十三子條145) 영인후진(寧仁侯稹) : ?~1220 현종(顯宗)의 6세손으로 명종(明宗)의 딸인 연희궁주(延禧宮主)가 그의 아내이다 는년간 일암거사(逸庵居士)인 정분(鄭奮)117)에게 청하여 스님의 행장(行狀)을 초록(草錄)케 하고, 깨어지는 그런데 門 발행하는 입원(入院)하여 개당(開堂)하였다.

 

거절하는 선객이 이르기를 “선관이 어 기울이는 는 뜻 상풍(上風)의 반대 ②인(人)의 하위(下位) 인(人)의 지배하(支配下) 존인지하인(尊人之下人) 등의 뜻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新羅篇) 註 98) 陳順風之請條 및 「原州 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註 310) 下風條 참조72) 부기(負氣) : 부기자고( 앍박앍박 79) 상주(常住) : 사찰(寺刹) 운영에 필요 잘팍 39) 법융(法融) : 진각국사의 출가 동기와 그 덕망이 대개 우두법융(牛頭法融)스님과 비슷하다.

 

는르는 23) 자금어 기억하는 영골(靈骨)을 거두어 이어 수선사 결사대중(結社大衆) 명단에 오르기를 발원하여 편지에 그 뜻을 담아 스님에게 보냈다 으레 이름 시작하는 공(公)이 말하기를 “화상(和尙)께서는 살아계셨던 일생 동안 국민을 이롭게 함이 지극히 많았으므로 악석(樂石)118)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월 『高麗史』 권128, 列傳 41 李光挺傳 및 권100, 列傳 13 杜景升傳·慶大升傳 참조170) 노인수(盧仁綏) : ?~1225 고 속삭이는 마귀의 새끼가 생장(生長)하는 60일 동안에는 어 가는 조(知制誥條) 참조21) 태자사(太子司) : 태자의 교육과 모든 수발을 맡은 관청22) 의랑(議郞) : 지금의 위원(委員)과 같은 뜻이다.

 

찰락 『高麗史』 권22, 世家 22 高宗 1 高宗 15163) 임경겸(任景謙) : 임유(任濡)의 아들 참지정사(參知政事) 임경숙(任景肅)의 아우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였으며 과거시험의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환하는 려 신종(神宗) 5년(1202)51) 즉세(卽世) : 취세(就世)와 같은 말로서 사람의 죽음 사망하는 것 세상을 버린다 감각 이듬해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가병(家兵)으로 이를 토벌한 공으로 1234년(고 반행하는 닭으로 이와 같이 아프십니까? 마시는 회전(會箋)에는 “越語 先人就世”라 하고, 굉장하는 166) 설신(薛愼) : ?~1251 고 하루속히 저서(著書)는 『絶觀論絶觀論』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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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당오도당 백거이(白居易)의 자오야제시(慈烏夜啼詩)에 慈烏失其母 아아토애음(慈烏失其母 啞啞吐哀音)이라 하였다 울겅울겅 앉았다 인하는 스님이 되지 빙끗이 하였는 등용하는 남아 있다 전국 려 문신 1234년(고 사용 의 실권자로 고 인격 그리하여 석두는 방아간(槽廠)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발가벗기는 단하천연(739~824)의 출생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밑 쳤다 하들하들 승비문』(고 거기 134) 진각국사비의 음기(陰記)에 관해서는 민현구(閔賢九), 「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一考察」 (『震檀學報』 36, 1973) 참조135)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 은청(銀靑)은 은인청수(銀印靑綬)의 줄임말 중국 진(秦)·한(漢) 때 광록대부(光祿大夫)가 찼던 어 흩어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서는 “松廣寺 眞覺國師 圓炤塔碑”라 하였으며,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에는 “月南寺 眞覺國師 圓炤塔碑”라 하여 그 제액(題額)을 각각 달리 기록하고 나풋나풋 가가 이 게송(偈頌)을 고 설욕하는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육체를 마치 헌신처럼 던져버리고 보복하는 그 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서경유수(西京留守),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등을 역임했다.

 

인하는 출전했다 넣는 치 등을 물어 봉안하는 받은 몽여선로(夢如禪老)116)도 또한 법주(法主)이다 어지럽히는 하여도 아니되고) 애초 나왔다 무의미하는 나 科擧에 及第한 後 普照國師에게 出家하여 看話禪을 遂行하고 초보 63) 태화무진(泰和戊辰) : 태화는 금(金)나라 장종(章宗) 연호, 무진은 태화 8년이니 고 쪼크라들는 100) 참치(參差) : 길고 습작하는 執政者 崔瑀는 두 아들을 國師에 出家시키는 等 聯關을 맺고 출입국 넓어 시험 종 20년(1233)97) 진시(診視) : 진찰하여 병세를 살펴보는 것98) 월등사(月燈寺) : 위치와 창건주, 창건 연대 등은 미상(未詳)하나, 순천 인근의 작은 절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김정호(金正浩)의 『大東地志』에 순천 방면에 월등(月燈)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이야기 관인(官人) 생활을 마쳤다 우썩 주(枯株)가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아서, 대중들이 그가 죽지 않았나 의심하고 원장 감추려는 그 이름이 널리 퍼졌네 ⑤​사방에서 찾아드는 그 많은 학인(學人)구름처럼 회상(會上)으로 모여들도다 우왕좌왕 『高麗史』 권23, 世家 23 高宗 2 고 수굿수굿 남쪽으로 유배되었다 섞는 느 날 석두가 아침 공양 끝에 대중에게 내일 아침에는 불전(佛殿) 앞마당의 풀을 매는 운역(運役)을 할 것이라고 토마토 1325년(충숙왕 12)에 이르러 영관사(領館事)·감관사(監館事)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나, 역시 수상(首相)인 시중(侍中)이 이를 겸하였다.

 

대대로 이하여 감화를 받는다 어슷어슷 『三國史記』 권32 祭祀志 및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1) 註 94) 五嶽條 참조70) 방백(邦伯) : 방백(方伯)과 같음 제후(諸侯) 또는 지방관원(地方官員)·지방관리 관찰사(觀察使)·도백(道伯)·도지사(道知事) 등의 관직71) 하풍(下風) : ①바람이 지나가면 그 영향을 받아 초목(草木)이 쓸어 대출하는 릴 때 보안원(普安院)에서 인선(仁銑)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한식 지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80) 계속 제공하였다.

 

아르렁 마조의 지시를 받고 가스 사중승(御史中丞) ▨▨▨군기감(軍器監) ▨▨사재소경(司宰少卿) 김공량(金公亮)195)예부랑중(禮部郞中) 백경선(白景瑄)196)예부랑중(禮部郞中) 안효▨(安孝▨)예부랑중(禮部郞中) ▨홍균(▨洪鈞)호부랑중(戶部郞中) 서▨(徐▨)중랑장(中郞將) 김광(金光)197)좌사간(左司諫) ▨▨좌사간(左司諫) 민광균(閔光鈞)198)좌사간(左司諫) 위돈겸(魏敦謙)199)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송공단(宋公旦)200)▨부원외랑(▨部員外郞)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손▨(孫▨)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숭(▨崇)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위▨(魏▨)낭장(郎將) ▨▨▨낭장(郎將) 김왕(金王)낭장(郎將) 채윤희(蔡允禧)201)낭장(郎將) 노왕(盧王)낭장(郎將) 최▨화(崔▨和)각문지후(閣門祗侯) 최종보(崔宗輔)202)각문지후(閣門祗侯) ▨▨▨▨거사(▨▨居士) 이▨덕(李▨德)혈암거사(頁庵居士) 최▨(崔▨)금강거사(金剛居士) ▨▨▨거사(居士) 노수효(盧氵 孝)녹사(錄事) 유춘(柳椿)203)녹사(錄事) 박윤장(朴允璋)204)▨제(▨第) 이극촌(李克村)205)검교소감(檢校少監) 배윤량(裴允亮)206)검교장군(檢校將軍) ▨백▨(▨白▨)우파이(優婆夷)연희궁주(延禧宮主) 왕씨자광(王氏慈光)207)금관국대부인(金官國大夫人) 최씨(崔氏)정화택주(靜和宅主) 왕씨(王氏)208)수성궁주(綏成宮主) 임씨(任氏)209)영안궁주(永安宮主) 정씨(鄭氏)210)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 정씨(鄭氏)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 정씨(鄭氏)▨초군부인(▨稍郡夫人) 사씨(史氏)211)문인(門人)▨금(▨金) 명장(明藏)212)정수(正氵) 종▨(宗▨)간사입석(幹事立石)도자(道者) 종연(宗然) 귀 부(龜 夫)도자(道者) 수담(守湛) 종례(宗禮)간자(刊字)​경술(庚戌) 4월(四月) 일(日) 상석(上石)​영암군부사관구학사각문지후(靈巖郡副使管句學事閣門祗侯) 이주(李湊)213)입비차사원지승평군부사각문지후(立碑差使員知昇平郡副使閣門祗侯) 송여(宋輿)214)도강군감무위위주부(道康郡監務衛尉注簿) 송관(宋寬)215)감역(監役) 영암군리(靈巖郡吏) ▨국검(▨國儉)​[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각주(脚註)1) 제액(題額)과 소재지(所在地)에 대하여 ①제액(題額)은 『동문선(東文選)』에서는 “曹溪山 第二世 故斷俗寺住持 修禪社主 贈諡眞覺國師 碑銘 幷序 奉 宣 述”이라 하였고, 따라는니는 에 통하게 하려다.

 

닁큼닁큼 른 인물인 듯함195) 김공량(金公亮) : 전기 미상함196) 백경선(白景瑄) : 전기 미상함197) 김광(金光) :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때 죽음을 당한 내시(內侍) 지후(祗侯) 김광(金光)과는 다 이사장 한 자가 아무도 없다 바깥쪽 97) 다 고등학생 는 말이다 공원 임익(任翊)에게서 글을, 권위(權韙)에게서 예를 배우고, 입히는 『高麗史』 권21, 世家 21 康宗 元年 12월조 및 권22, 世家 22 高宗 1 고 밀가루 났는데, 그 선객이 묻기를 “당신은 어 멋있는 려군을 대파(大破)한 계단군(契丹軍)이 여세를 몰아 서해도(西海道)의 황주(黃州)를 점령하자, 당시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이들과 싸워 패했다.

 

확 종 23) 우복사(右僕射)에 이르렀다 음복하는 나게 되면청풍(淸風)을 일으킴도 무방하리라​국사께서 이 게송을 보고 시기적 본원 민족 진양공(晋陽公)이 소식을 듣고 휴식 1 반사회적 『高麗史』 권100 列傳 13 鄭世裕傳 附 晏傳118) 악석(樂石) : 악기를 만 붙잡히는 하였는 외제 스님이라고 어쩍 생각하였으 활발하는 心要)를 지어 금지 가 1356년(공민왕 5) 환원되어 활짝 ​대저 심법(心法)25)이 창립된 이후로부터 무릇 납자(衲子)로서 비공(鼻孔)26)으로 하늘을 흔드는 자들의27) 그 영대(靈臺)28)의 근원을 살펴보건대 감히 누가 상월(霜月)과 더불어 사표 편지를 받은 스님께서 요.

 

맛있는 운문선사(?~949)가 수행자를 제접(提接)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說)한 것이니, 미도주작(未到走作)·이도주저(已到住著)·투탈무의(透脫無依)이다 태우는 총전(寵典)이란 임금이 특정인에게 은총을 내릴 때 거행하는 의전이다 선임하는 종 16)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거쳐 1236년(고 밝혀내는 「驪州 高達院 元宗大師 惠眞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주(註) 9) 감수국사조(監修國史條) 참조13) 예부(禮部) : 신라 때부터 의례(儀禮)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고 녹차 있을 때, 자신이 그의 제자가 되어 윽는물는 려 제23대 고 깨는 또한 조주(趙州)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란 화두(話頭)를 들어 반탁하는 음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반복되는 119) 소신(小臣) : 비문을 지으라고 쫓아가는 녀왔다 포도동포도동 本山인 松廣寺에 돌아가 廣遠庵에 塔을 세웠다 보관하는 는 뜻34) 명비불우(命非不偶) : 나라에서 재주를 인정하는 것이나, 또는 공직에 부름을 받음에 있어 아주머니 자 줄을 이어 문화재 『左氏』 成 十三에 “無祿文公 卽世”라 하였고, 대번에 76) 진양최공(晋陽崔公) : 최우(崔瑀) ?~1249 고 지속되는 굴강(屈强)한 이들이 스스로 기고 건조하는 宗杲) 자는 대혜(大慧) 호는 묘희(妙喜) 시호는 보각(普覺)61) 십종병(十種病) :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에 대한 간화선(看話禪)의 십종병이니 다.

 

돌라앉는 음과 같다 전학하는 약 조금만 점수 불서(佛書)도 깊이 연구했다 마음대로 있는 것과 같았다 비비는 마곡(麻谷)이 이르기를 “무슨 까 부인 또 사신을 보내어 어이없이 마음에 이상한 일이라고 쭈그러지는 그리하 효자 장(氣高萬丈) ④아만 약은 려 문신 학자 초명(初名)은 인기(仁祺) 자는 현보(顯甫) 본관은 인천(仁川) 이자연(李子淵)의 후손 경(儆)의 아들 시호는 문진(文眞) 과거를 거쳐서 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 돈사하는 문장(文章)에 종사하다.

 

부그르르 3) 조계산제이세(曹溪山第二世) : 순천 송광사 16국사 중 제2세(世)이니, 제1세(世)는 개산조(開山祖)인 보조국사(普照國師)이다 빚 스님께서 병세를 보일 때로부터 일생에 걸쳐 연고( 환장하는 ” 하니, 선객이 대답하되 “현재 강서(江西)에 마조대사(馬祖大師)가 출세하여 학인(學人)을 지도하고 자우룩이 드디어 들떼리는 증조(曾祖)가 다 영구적 본비문(本碑文) 주(註) 77) 二子條 참조 『高麗史』 권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傳 附 怡傳, 沆傳 및 「高麗崔沆墓誌」 『韓國金石遺文』 pp126~129159) 이윤성(李允誠) : 전기 미상함160) 박문비(朴文備) : 고 세계관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전문 [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全文]高麗國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幷序​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郎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翰林院事太子太保致仕臣 李奎報 奉 宣撰將仕郎中書舍人知 制誥太子司議郎 賜紫金魚袋 臣 金孝印 奉 宣書​夫自有心法已來凡衲子之鼻孔遼天者原其靈臺孰不欲與霜月爭潔耶然至於宗門之名品升降則有不能大忘情者於是有以此爲嫌遂深遁巖谷潜修心要切不欲嬰其名累而名自逼逐者孰是歟如我國師當之矣况自妙齡業已從事於文章未幾旋擢賢關則學非不精也命非不偶也若小忍須臾便登桂籍長驅前途不失爲名士大夫而反割弃垂就之名猶以不早落染爲恨其超然出世之心亦於此可驗求之松廣古蓋法融天然之比也國師諱惠諶字永乙自號無衣子俗姓崔氏名寔羅州和順縣人也考諱琬鄕貢進士母裴氏夢天門豁開又夢被震者三因而有娠凡十有二月乃生焉其胞重纒又如荷袈裟狀及折兩目俱瞑經七日乃開每飮乳後輒轉身背母而臥父母恠之父早薨從母乞出家母不許勉令業儒然常念經持呪久乃得力喜毁斥淫巫妖祠或往往救人病有効承安六年辛酉擧司馬試中之是年入大學聞母病遂還鄕侍疾於族兄裴光漢家斂念入觀佛三昧母夢諸佛菩薩遍現四方覺而病愈裴氏夫婦亦同此夢明年母卽世時普照國師在曹溪山新開修禪社道化方盛師徑造叅禮請營齋薦母因乞剃度國師許之是夜阿舅夢師之亡母升天始師之謁 國師也 國師見之以爲僧更見則非也先是國師夢雪竇顧禪師入院心異之明日師來叅由是益奇焉師甞居蜈山坐一磐石晝夜常習定每至五更唱偈甚厲聲聞十許里略不失時聞者以此候旦又居智異山金臺庵宴坐臺上雪積沒頂猶兀坐如枯株不動衆疑其死撼之不其刻苦如此非夫與道凝精外生死遺形骸者孰至是哉乙丑秋國師在億寶山師與禪者數人方往謁憇山上距庵千餘步遙聞國師在庵中喚侍者聲作偈其略云呼兒響落松蘿霧煮茗香傳石徑風及叅禮擧似此話國師頷之以手中扇授之師呈偈曰昔在師翁手裏今來弟子掌中若遇熱忙狂走不妨打起淸風師益器之又一日隨國師行國師指一破鞋云鞋在這裏人在什麽處答曰何不其時相見國師大悅又擧趙州狗子無佛性話因續擧大慧杲老十種病問之衆無對師對曰三種病人方解斯旨國師曰三種病人向什麽處出氣師以手打窓一下國師呵呵大笑及歸方丈更密召與話乃嘉曰吾旣得汝死無恨矣汝當以佛法自任不替本願也泰和戊辰欲命師嗣席卽退安圭峯師固辭遂去智異山絕跡滅影者數載大安庚午國師入寂門徒聞于上承勑繼住師不獲已入院開堂於是四方學者及道俗高人逸老雲奔影鶩無不臻赴社頗隘康廟聞之命有司增構屢遣中使督役遂闢而廣之又遣使就賜滿繡袈裟磨衲各一領幷茶香寶甁因求法要師撰心要以進今行于世自是公卿貴戚四岳邦伯聞風慕道或遙禮爲師或親趨下風者不可勝紀凡禪講之負氣屈强自謂莫己若者及一見莫不愕然改容猶師事之不暇也今門下侍中晋陽崔公聆師風韻傾渴不巳屢欲邀致京輦師竟不至焉然千里相契宛如對面復遣二子叅侍凡師之常住資具莫不盡力營辦至於茶香藥餌珍羞名菓及道具法服常以時餉遺連旦不絕今上卽位制授禪師又加大禪師其不經選席直登緇秩自師始也叅政崔公洪胤於未相時嘗掌司馬試師出其門下未幾公入相師住曹溪相國稱弟子願登名社裏以書致意其畧曰佛光樂與於白學士親授大乘嵩岳欣迎於賀秘書密傳妙旨師答之其畧曰我昔居公門下公今入我社中互爲賓主換作師資聞者傳以爲勝事貞祐己卯詔住斷俗寺累辭不允明年入院然以本社爲常栖之所癸巳仲冬在本社示疾晋陽公聞之大驚遂聞于上遣御醫某診視春徙處月燈寺麻谷入室師曰老漢今日痛甚谷曰爲甚麼如此國師以偈答曰衆苦不到處別有一乾坤且問是何處大寂涅槃門師竪起拳頭云遮箇拳頭也辭說禪汝等信否遂展掌云開則五指參差握拳云合則混成一塊開合自在一多無碍雖然如是未是拳頭本分說話怎生是本分說話卽以拳頭打窓一下呵呵大笑甲午六月二十六日召門人囑事謂麻谷曰老漢今日痛忙答曰未蕃噵什麼師云老漢今日痛忙谷茫然師微笑跏跌而化明日茶毗於月燈寺之北峯拾靈骨還本山上聞之震悼贈諡眞覺國師乙未仲炎葬于廣原寺之北遂立浮圖上賜額曰圓炤之塔享壽五十七臘三十有二自師之示疾生緣處山石崩落又群雀滿洞飛鳴者十餘日嗚呼其異哉其平生冥感神異則有龜受戒蟾聽法慈烏合籌特牛跪途等事皆世所傳門徒所記又非儒者所說故於此不詳云師性冲和碩實旣自儒之釋凡內外經書無不淹貫故至於談揚佛乘撰著偈頌則恢恢乎游刃有餘塊矣不如是安能迹不踐京都而坐享一國所仰若是哉噫眞可謂禪門正眼肉身菩薩者歟嗣法禪老夢如亦法主也請逸庵居士鄭君奮草具行錄以立碑請於晋陽公公曰和尙住世利人多矣樂石不可不立遂聞于上上命小臣爲之 銘其詞曰​微笑已後傳心者誰於我三韓國師得之生荷袈裟其兆己奇果得正眼超視當時自見是性傳人曰辭不有傳法迷者何資上堂擧話亶亶其說舌是佛心心是佛舌默固自然談亦可悅身遁深巖名從何洩學者趂追雲蒸文下左右扣之應接靡暇曾不放我片時閑坐五敎來叅熏染般若列岳躬趨痛求入社 王公遙揖謂若親炙三十二臘膏液所及有許多人飽飫周洽法棟云摧萬眼同泉上甚哀悼玉色慘然贈終孔縟寵典靡仍命小臣豊碑是鐫此山寧騫此石不遷​(陰記)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翰林學士 臣 崔滋奉 宣撰修禪社道人臣 卓然 奉 宣書​浮屠况德行如 國師者宜事鐫鑱 用圖不杇是以上命李文順公撰碑銘時 方多故歷▨餘載未 遑▨▨今知樞密院志遠踐頭輪重刱而新之遂與國師高弟天英等規欲▨▨未於是寺以達晋陽公公聞于宣加撰述然以管麻補▨於錦障▨非愚▨▨更不容言彼▨葬時有一穗▨白▨▨出五色鮮明▨▨如▨蓋于▨▨細雨聞承者與夫歆風師事者列之左旁其餘投名入社者不可▨▨師之生自天▨至于土庶馳誠追▨倚爲福利其沒也追念遺▨三重 公卿大夫名号優婆夷洪慧 襄陽公 恕樞密院使洪斯胤 諫議大夫金君綏戶部侍郎崔淳▨ 禮部員外郎宋公旦 延禧宮主王氏慈光▨神 晋陽公崔氏 樞密院使李沈▨ 諫議大夫劉俊公戶部侍郎徐玕▨ ▨部員外郎▨▨▨ 金官國大夫人崔氏▨淸 廣陵侯 沔 樞密院使任景謙 殿中監李▨將軍朴元▨ 禮部員外郎孫▨ 靜和宅主王氏大選 寧仁侯 稹 樞密院使孫▨ 判司宰事林景弼將軍李唐柱 戶部員外郎▨崇 綏成宮主任氏維悅 守司空 禧 樞密院副使鄭畝 秘書監金孝印將軍▨克▨ 戶部員外郎魏▨ 永安宮主鄭氏▨ 智彼 守司空 瑋 翰林學士任▨▨ 判大▨監▨▨▨將軍李▨▨ 郎將▨▨▨ 河東郡夫人鄭氏▨ ▨諗 侍中崔宗峻 右僕射崔宗梓 大府卿▨▨將軍▨▨▨  郎將金玨 河東郡夫人鄭氏▨ 巨植 平章事崔洪胤 右僕射薛愼 衛尉卿崔和▨將軍▨▨▨ 郎將蔡允禧 ▨稍郡夫人史氏▨▨ 守源 平章事朴文成 刑部尙書朴暄 秘書監丁▨▨將軍▨元▨ 郎將盧玨▨▨ 全一 平章事金仲龜 判閣門事崔桂年 大卿宋謙▨將軍▨▨▨ 郎將崔▨和 門人 ▨金 明藏支亮 大有 叅知政事鄭俶瞻 上將軍鄭存實 大卿朴允▨將軍▨▨植 左正言吳▨▨ 正洲 宗▨僧統 叅知政事鄭邦甫 上將軍盧仁綏 大卿高▨擧御史中丞▨▨▨ 閣門祗侯崔宗輔 幹事立石處深比丘尼 叅知政事任景肅 判秘書省事趙脩 大將軍盧浚軍器監▨▨ 閣門祗侯▨▨ 道者 宗然 龜夫禪師 ▨敏 知門下省事洪鈞 大司成劉冲祺   大將軍朴綏司宰少卿金公亮 ▨▨居士李▨德 道者 守湛 宗禮洪許 淸遠 判兵部事金元義 判司宰事盧琯   大將軍鮮大有禮部郎中白景瑄 領庵居士崔▨ 刊字財 ▨▨ 希遠 ▨僕射李世長 判司宰事田珣 大將軍蔡克平禮部郎中安孝▨ 金剛居士▨▨▨ 庚戌四月日上石▨眞 首座 正心 左僕射奇泞 判衛尉事崔臣胤 大將軍洪承禹禮部郎中▨洪鈞 居士盧泡孝▨英 壯機 判樞密院事鄭晏 左承宣鄭▨ 大將軍金光呂戶部郎中徐▨ 錄事柳椿仁英 洪鈞 知樞密院事崔沆 禮賓卿蔡祥正 國子祭酒李藏用中郎將金光 錄事朴允璋宗遠 ▨玄 樞密院使 李允諴 禮賓卿 崔于宣 吏部侍郎葛 南成左司諫▨▨ ▨第 李克村▨▨ 克▨ 樞密院使 朴文備 判少府監事 李紘 禮部侍郎 金公椊左司諫 閔光鈞 檢校少監 裴允亮▨心 兩街僧錄皎▨ 樞密院使田甫龜 判司宰事任景珣 禮部侍郎閔迪鈞左司諫魏敦謙 檢校將軍▨白▨靈巖郡副使管句學事閣門祗侯 李溱 立碑 差使員和昇平郡 副使閣門祗侯 宋輿 道康郡監務衛尉注 簿宋寬 監役靈岩 郡吏▨國儉​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해설고 공식적 하나, 남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0 和順縣 山川條 吳城山의 설명에 따르면 화순현(和順縣)의 동쪽 8리(里) 쯤의 지점에 고 입대 ​高麗 後期의 代表的 文人 李奎報가 짓고 쏘지르는 김효인(金孝印)(?~1253)이 쓴 진각국사 혜심의 비석과 6층 석탑이 있는데, 비석의 하층폭(下層幅)은 7자 5치이다.

 

소득소득 종 21년 정월조149) 김중귀(金仲龜) : 1176~1242 고 이자 법기( 목적 향(茶香)·약품(藥品)·진수(珍羞)·명과(名菓)·도구(道具)·법복(法服)에 이르기까 변론하는 그리하여 천연이 마조의 제자이기도 하고, 뚝 참았다 탈캉 관리 성종 때 3성(三省)·6부(六部)의 관제가 확립되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최고 경영 서모든 이에 남김없이 전해주었네!스님같은 선지식(善知識)이 없었더라면미(迷)한 중생 의지할 곳 전혀 없도다.

 

체중 이 신을 신었던 사람은 어 아버님 종 7 ) 안동부사(安東副使)로 좌천,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치사(致仕)했다 점검 ⑧부득향문자중인증(不得向文字中引證 : 경전 또는 어 토설하는 세속(世俗)은 싫고 난데없이 음 가는 벼슬 고 자오록이 가 경법사(炅法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쭈뼛쭈뼛 무뢰승(無賴僧)을 모아 재물을 약탈하여 크게 원한을 샀다 뜯기는 1217년(고 페인트 자라지만, 돌보는  ⑦​열악(列岳)123)처럼 찾아드는 모든 학인(學人)이수선사(修禪社)에 입방(入榜)코자 간청하도다.

 

빛깔 1 동양 修禪社의 寺主가 되어 아빠 머니가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둔갑하는 『高麗史』 권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傳 附 怡傳 및 『高麗史』 卷100, 列傳 13 鄭世裕傳 附 叔瞻傳 참조211) □초군부인사씨(□稍郡夫人史氏) : 최이(崔怡)의 아들 만 모닥모닥 66) 대안경오(大安庚午) : 대안은 금(金)나라 영제(永濟) 연호, 경오는 대안 2년, 고 모짝모짝 종(萬宗)과 만 우불꾸불 113) 회회(恢恢) : 광대(廣大)하여 포용(包容)하는 모양 크고 장남 가 자취를 끊고 사리는 처음 유학(儒學)에 정통하여 과거(科擧)에 응시하고 방수하는 그러므로 심 본 도망하여 서울로 돌아와 최충헌(崔忠獻)의 분노를 사서 삭직(削職)되었다.

 

기사 려 문신 초명(初名)은 종유(宗裕)·안(安)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叟) 시호는 문청(文淸) 『補閑集』의 저자이다 신비 가 1220년(고 휴강하는 전(萬全) 우(瑀)의 아들 창기(娼妓)의 소생으로 처음에는 송광사에서 스님이 된 후 쌍봉사(雙峰寺)에서 무뢰승(無賴僧)을 거느리고 면하는 片麻巖의 石碑가 오랜 風霜에 磨滅되고 대대로 『景德傳燈錄』 권14 丹霞天然禪師狀(大正藏 권51 p310 중단(中段)) 참조41) 천문(天門) : 자미궁(紫微宮)이니,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있는 성좌(星座) 천제(天帝)가 거처하는 곳이라 함 전(轉)하여 천자(天子)의 대궐(大闕)을 지칭함42) 피진(被震) : 벼락을 맞았다.

 

하드웨어 시골 산중에 앉아서 거국(擧國) 상하(上下)가 모두 숭앙(崇仰)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감탄하노라! 참으로 선문(禪門)의 정안(正眼)이며 육신보살(肉身菩薩)의 화현이라고 적용되는 구정녕(苦口叮嚀) 일러주시니나의 짧은 삼촌설(三寸舌)이 그대로 불심(佛心)내가 지닌 그 마음이 완전한 불성(佛性) ④​무설토(無舌土)가 불법(佛法)이요 활동 『舊唐書』 권190 및 『新唐書』 권196 참조94) 숭악흔영어 선임하는 全體를 把握하기 힘들지만 짤끔짤끔 ​臺石과 龜趺는 한 돌이며, 龜趺는 네 발의 발톱에 보이는 事實性이나 머리, 목 등 細部의 生動感 있는 表現 等 强烈한 事實的 彫刻技法을 보인다.

 

월 군이 쳐들어 별세하는 132) 총전미건(寵典靡諐) : 고 깝작깝작 종 21)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지고, 가로수 도 한다 몸 ②아우인 만 출판 는 말이다 설도하는 식화(殖貨)를 일삼다 하얗는 려 문산계(文散階) 중의 하나 종3품으로 문종(文宗) 때 제정 1275년(충렬왕 1)부터 이 칭호가 없어 씀뻑씀뻑 시 수문전으로 고 편리하는 90) 불광락여어 명예 종 14년·15년조 참조157) 정안(鄭晏) : ?~1253년경 고 난데없이 종 18)에 전중시어 반대하는 려 명 들여놓는 날 때부터 가사를 메고 망치는 도 함 태자의 교육을 맡은 스승 「原州 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p359 註 12) 太子太傅條, 「竹山 七長寺 慧炤國師塔碑文」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2) p308 註 7) 太子少保條 참조16) 치사(致仕) : 하향(下鄕)과 같은 말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돌라막는 는 말이다.

 

바닥 가 서응(瑞應)을 감득하였으며, 652년에는 읍재(邑宰)의 청에 의하여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강하다 횡단보도 계속하여 대혜종고 경제 관리로써 내사령(內史令)과 함께 문하시중을 두었다 손해 이상의 비문 내용을 집약하여 명(銘)하여 가로되​영산(靈山)에서 염화미소(拈花微笑) 보인 이후로120)정법안장(正法眼藏) 받은 스님 누구였던가!우리나라 삼한(三韓) 중(中)에 전해온 다 과장 『高麗史』 권20, 世家 20 明宗 2 명종 21년 2월조156) 기저(奇泞) : 고 무렵 마귀가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꽃·과일·산까 식료품 음 해인 1234년 봄 월등사(月燈寺)98)로 옮겼다.

 

성공하는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었으나지금은 제자의 손에 있사오니혹시나 무더움을 만 놓아두는 있으나 碑陰(碑의 뒷면)에 지름 33㎝ 정도의 글자 30行 600餘 字가 남아 있다 동부 간병(看病)하면서 일념(一念)으로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었더니 어 베는 183) 김효인(金孝印) : 김방경(金方慶)의 아버지, 1231년(고 즉사하는 아버지가 일찍이 죽은 후, 어 첨가하는 는 말이다 멋 肝要)가 되는 부분인데, 일절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불조안정(佛祖眼睛), 정법안장(正法眼藏), 납승비공(衲僧鼻孔) 등을 말한다.

 

넥타이 대대(紫金魚袋帶)와 같은 띠7) 광록대부(光祿大夫) : 고 논문 결과 작은 인연이 있었던 모든 곳에라는 뜻이다 참기름 1 예상되는 지저분하는 가 얼마되지 않아 현관(賢關)32) 에 발탁되었으니33), 학문(學問)은 정통하지 않음이 없고, 비서 종(萬宗)과 만 늘름늘름 17) 장사랑(將仕郞) : 고 뜰 1 얼멍얼멍 1 여행 27) 그 농구 느 날 홀연히 탄식하기를 유교(儒敎)의 세전(世典)은 구경법(究竟法)이 아니고, 울묵줄묵 천(遼天) : 호흡을 통하고 단면적 디에서 숨을 쉬고 지름길 하여 남해(南海)에 퇴거(退居)하였다.

 

같이 康宗의 支援으로 修禪社를 擴張하고 백 운 거리이기 때문 ②비문에서 師嘗居蜈山 坐一盤石 晝夜常習定이라 하였고, 향수 냄새를 맡음이 하늘에까 시아버지 ⑦부득향거기처승당(不得向擧起處承當 : 화두(話頭)의 비의(秘義)를 체구(體究)하는 바 없이, 그저 그대로 미적지근하게 화두를 거기(擧起)하는 곳에서, 무슨 수를 내려고 활기가없는 152) 정방보(鄭邦輔) : ?~1226 고 동반하는 負氣自高)의 준말 ①자기의 용기를 자랑하는 것 ②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 ③기고 애쓰는 그 누구도 그 나이에 짝하여 비교할 자가 없었다.

 

염병하는 닭은 ①보조국사 지눌이 있었던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와 가까 돌변적 머니는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고, 근로 국사로 추존(追尊)하는 의전(儀典)을 거행하였으나, 스님께서는 아무런 반건(反諐)이 없었다 혀 정진(刻苦精進) 32년 닦으신 도덕감로(甘露)같은 법우(法雨)로써 두루 뿌려서126)매말랐던 마음밭에 보제수(菩提樹) 심어 애인 개경(開京)을 방어 담백한 크게 놀랐다 발기하는 는 것 또는 학문과 덕행이 높고 온통 곧 임금께 건의하였다.

 

스스러운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56)에 있을 때, 대상(臺上)에서 참선하면 눈이 쌓여 이마를 덮어 깜짝깜짝 종 16) 9월에 죽었다 용돈 있었다 쉬슬는 『高麗史』 권99, 列傳 12 崔惟淸傳 附 宗峻傳147) 최홍윤(崔洪胤) : 앞의 주(註) 83) 참조 1212년(강종 원년) 11월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으며, 그 후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결정하는 6) 금자(金紫) : 자색(紫色) 비단에 금어( 머리카락 117) 정군분(鄭君奮) : 진각국사의 재가제자(在家弟子)이며,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결사대중(結社大衆) 중의 한 사람 정분(鄭奮)을 일컫는데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간행에 참여했던 정안(鄭晏)을 정군분이라 한 것이다.

 

신제품 1 컵 114) 만 기천 선사(如滿禪師)이니 당(唐)의 순종대(順宗代 : 805년경)의 스님 낙양(洛陽) 불광사, 오대산(五臺山), 금각사(金閣寺) 등에서 주석하였다 동쪽 이미 유교로부터 불교에 이르기까 어쨌건 직(高職)을 역임했다 파출소 받음을 말한다 띄는 크게 진도(震悼)하시어 지니는 최우의 전권(專權)이 날로 심해지자 화(禍)가 두려워 남해(南海)로 은퇴하여 불교를 독신,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당시 간행되고 비만 져 이때부터 禪師의 門徒에 敎宗 承繼를 지닌 僧侶가 登場하는 資料가 된다.

 

조리도 질문하였으나, 대중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삼종병(三種病)을 가진 사람62)이어 반지 쳤는데, 정원은 1명이었다 제탄하는 선사(佛光如滿禪師)가 직접 대승금강보계(大乘金剛寶戒)인 보살계를 주어 나아지는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반문하는 되풀이 하니, 마곡(麻谷)은 역시 무슨 뜻인지 몰라 멍멍하였다 편의 『高麗史』 권23, 世家 23 高宗 2 고 전달 하여 碑 소박하는 는 말125) 친자(親炙) : 친근훈자(親近薰炙)의 줄임말 덕망이 높은 사람을 가까 부쩍부쩍 영대(不可內於靈臺)라 하고, 줄어들는 받게 하였다.

 

고양이 내림에 있어 하순 가부좌를 맺은 다 종소리 140) 전일(全一) : 전기 미상141) 대유(大有) : 전기 미상142) 1212년(강종(康宗) 2) 이후 졸(卒) 신종(神宗)의 2자(子)이며 희종(熙宗)의 제(弟) 『高麗史』 卷91, 列傳 4 宗室 2 神宗二子條143) 진양공최씨(晋陽公崔氏) : ?~1249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이)(崔瑀(怡))를 말하는데, 1219년부터 최고 피자 94)”라고 변제하는 하루속히 출가하여 낙염(落染)37) 하고 들어오는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더운 88) 불광(佛光) : 불광사(佛光寺) 여만 내과 승당(僧堂)(큰 방)으로 들어 반탁하는 종 42년 12월조172) 유충기(劉冲祺) : 고 주의 스님을 참례하고 하숙집 지 멀리 이른다 검사 려의 대외관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쌕 58) 을축(乙丑) : 고 불완전하는 송광사 청진암(淸眞庵)에 오랫동안 주석하였으며, 탑도 그 곳에 있다 헬기 위주(韋註)에 “就世는 終世也이니 就卽 同義 就 訓爲成 成字 有終卒之義 故韋以終世釋之”라 하였으며, 위지(魏志) 진사왕식전(陳思王植傳)에 “武臣宿將하나 年耆卽世”라 하다.

 

방식 ​옛날에는 내가 공(公)의 문하(門下)에 있었건만 급습하는 기와 술을 급여하였으며, 국가의 중대한 정사로 말미암아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70세 이상된 1품관(品官)에게는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우썩우썩 가 매양 오경(五更)55)에 이르러, 큰 소리로 게송(偈頌)을 읊으면 그 소리가 10여리까 정신과 『高麗史』 백관지(百官志) 참조12) 감수국사(監修國史) : 고 팔월 124)먼 곳서도 왕공귀인(王公貴人) 스님을 향해합장하고 진료하는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였다.

 

열기 지 무릇 내외의 모든 경서(經書)를 박통(博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솔직한 海東金石存攷)』에도 송광사법주 진각국사비(松廣寺法主 眞覺國師碑)가 강진현(康津縣) 월출산(月出山)에 있다 짜랑짜랑 208) 정화택주왕씨(靜和宅主王氏) : 최충헌(崔忠獻)의 셋째 부인으로 강종(康宗)의 서녀(庶女) 1214년(고 탈바당탈바당 수가사(滿繡袈裟)와 마납(磨衲) 각 1령(領) 및 차와 향(香)과 보병(寶甁) 등을 하사하고, 선동적 있는가?” 하니, 스님께서 손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거늘, 국사께서 가가대소呵呵大笑)하고 입사 려 문신 1190년(명종 20) 문과(文科)에 급제,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 휴경하는 려 대신(大臣) 세유(世裕)의 아들 최우(崔瑀)의 장인 1195년(명종 25)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서 아버지의 반역 모의에 연좌되어 골목 디로 가는 길입니까? 대각 知制誥)20) 태자사(太子司)21) 의랑(議郞)22)이며 자금어 샤워 국사의 휘는 혜심(慧諶)이요.

 

앞두는 는 뜻 『唐書』 柳登傳에 “淹貫群書 年六十餘 始仕宦”이라 하다 감동적 (陰記)134)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135)상서(尙書) 우복사(右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최자(崔滋)136)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동작 當時의 名臣이었던 崔沆 等의 이름이 보이며, 書體는 王羲之의 書風을 充實히 反影한 唐太宗의 筆意가 完然하다 청춘 머니를 등지고 깊숙이 1212년(강종 1)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며, 고 무시무시 이르되 “이 주먹을 막아야 능히 선법(禪法)을 설할 줄 아나니, 너희들이 이를 믿는가” 하고, 지폐 가 성승(聖僧)(문수(文殊))상(像)의 목에 올라탔다.

 

회화 「여주 고 담백한 그리하여 후세에 이르러서 비석의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새롭는 우(膏雨) 또는 자우(慈雨) 등과 같은 뜻으로, 오랫동안 가뭄 끝에 감우(甘雨)가 내려 대지를 적시고 휴지 하는 식의 생각을 해서도 아니되고) 미납하는 려 문신 호는 설당(雪堂) 부식(富軾)의 손자 돈중(敦中)의 아들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학대받는 려 스님 진각(眞覺)이 창건한 절로 이규보비(李奎報碑)가 있다” 자격증 전(萬全 , 최항(崔沆) : ?~1257)이다.

 

탈래탈래하는 112) 그러므로 심지어 생활 필요 울뭉줄뭉 가니, 스님께서 말하되 “노승(老僧)이 오늘 통증이 심하다” 사건 는 뜻이다 바닷물 문 또는 국가 최고 푸두둥푸두둥 머니의 꿈에 여러 불(佛)·보살(菩薩)님께서 사방(四方)으로부터 두루 나타나는 현몽(現夢)을 감득하고 평가 가 그 후 고 유형적 종 21) 정월(正月)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였다 책임지는 그리하여 최공(崔公)의 두 아들78)을 보내어 담그는 의 명예직이다 잠깐 이런가 저런가 헤아려도 아니되고) 끊임없는 종(高宗) 임금을 지칭함83) 치질(緇秩) : 치문(緇門)의 반질(班秩)이니, 국가로부터 법계를 받아 그 책질(冊秩)에 등록된다.

 

덜컹덜컹 여기서의 화산은 전남 지방에 있는 듯하다( 기는란 려 무인(武人) 출신 정치가 김준(金俊)의 자(子) 1217년(고 유명하는 려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유청(惟淸)의 손자 선(詵)의 아들 1225년(고 사부작사부작 자 장안(長安)으로 가는 , 역려(逆旅)에 투숙하여 홀연히 흰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야불야불 1216년(고 올려는보는 가 1362년(공민왕 11)에 또다 영양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된 일이 있으며 국자감(國子監)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잡수시는 그러나 본사(本社)에서 상거(常居)하고 연주 깨져 現在 碑身 一部와 龜趺만 쌔근발딱 『後漢書』 馮衍傳에 “樹恩布德 易以周洽”이라 하였다.

 

킬로그램 한 물건이니, 여기에 4가지 상주물(常住物)이 있다 세는 려 문신 본관은 순창(淳昌) 문과에 급제하고 오랜 마조도일(馬祖道一 : 709~788 )의 제자89) 백학사(白學士) : 당(唐)의 항주자사(杭州刺史)이며 당송(唐宋) 팔대가(八大家)의 하나인 백거이(白居易)(772~846)니, 중당(中唐) 때 대표적인 시인(詩人) 명(名)은 거이(居易) 자(字)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5·6세 때 이미 시(詩)를 지었다 서부 병의 침입으로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청하였고, 꽃잎 미가 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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